1904-19304 1932년 경환목사 사임,김영로목사(7대) 취임,부속건물 신축(목사관,전도실,유치원)를 하다
2012.01.17 10:39
1932년 경환목사 사임,김영로목사(7대) 취임,부속건물 신축(목사관,전도실,유치원)를 하다
김영로 목사의 부임과 활동
경환 목사가 이임하고 김영로 목사가 청주읍교회 제7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황해도 안악 출신의 김영로(金永潞, 1890. 7. 18∼1965. 4. 15) 목사는 한학의 유풍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24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비록 성인이 되어 예수를 믿었으나, 조선기독교251)를 창시한 황해도의 김장호 목사가 당숙으로 기독교적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다. 그는 26세의 늦은 나이에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목사252)가 교장으로 있던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고,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사감으로 봉사했다.
그는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신천의 삼성소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1927년 윤산온 목사의 후원으로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제27회)하였다. 1932년 청주읍교회 임시 목사로 부임하고 그 해 가을 목사 안수를 받고 청주읍교회 제7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청주읍교회의 담임 목사는 공석으로, 윤산온 목사의 소개와 소열도 목사의 추천으로 청주읍교회에 부임하였다. 평소 친분있는 소열도 목사의 부탁으로 윤산온 목사는 자신이 후원하여 온 김영로 목사를 청주읍교회 담임 목사로 추천하였다.
김영로 목사는 1933년 제10대 충청노회장을 역임하고 1934년에는 청주성경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청주읍교회 제7대 목사로 시무하는 5년 동안 목사관, 전도실, 유치원 교사 등 부속 건물을 건축하는 등 시설 확충에 힘썼으며, 청주읍교회 창립 30주년 기념 교회로 청주제이교회253)를 설립하고 복음 선교에 힘썼다.
1936년 신사 참배를 반대하던 윤산온 목사는 그가 목회하던 평양 은행리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김영주 목사는 그곳을 돌보기 위해 청주를 떠났다. 평양 은행리교회에서 1년간 사역하고, 1937년∼45년까지 평안북도 삭주군의 삭주읍교회를 시무했다. 삭주읍교회를 시무하며 평북 벽동군, 삭주군, 창성군 지역의 교회로 구성된 삼산노회의 3·4대 노회장(1938년∼1939년)을 역임하였다. 또한 평북 삭주중학교 교장도 역임하였다. 이후 신탁통치 반대로 인민 재판에 회부되자 1946년 3월 1일 삭주를 떠나 월남하였다.
1946년 김영로 목사가 청주에 정착하자, 과거 청주제이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과, 특히 이북에서 남하한 교인들은 김영로 목사를 따랐다.
김영로 목사는 해방 후 충북노회장을 역임하고, 구연직 목사와 함께 충북 지방의 교회를 재건하고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6·25 후에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며 사회 계몽 및 문화 운동에 앞장서 교계와 지역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
김영로 목사는 예장과 기장이 분열 할 때 예장을 지킨 거목이었으며, 해방 후 출발한 청주중앙교회를 충북의 중추적 교회로 발전시켰다. 1958년 청주중앙교회를 사임한 후 교회를 돕다가 1965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