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1960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2012.01.17 10:43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박상건 목사의 망명
일제는 총회로 하여금 강제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한 후에 황국신민화와 교회 신앙을 훼절시키는 작업을 그대로 진행 시켜 나갔다. 1938년에 접어들어 중일 전쟁이 더욱 가열화하면서 일제 당국은 교회의 신사참배를 관철하기 위하여 더욱 강한 압박과 교묘한 공작을 벌였다.
이러한 공작은 청주지역에도 철저히 적용하였다. 1938년 5월 8일 “청주군내의 예수교 예배당이 종래의 신념을 시정하여 장로교, 천주교, 성결교 등이 신사참배를 서약했다”는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이 있고, 1938년 5월 11일 “괴산군에서 남기종 목사, 박규호 이호재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황도선양연맹’을 조직했다”는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이라든지, 1938년 5월 19일에 “충청노회장 박상건 청주제일교회 목사가 충청노회 소속 각 교회에 신사참배와 함께 국방헌금을 거출하기로 했다”는 매일신보의 기사내용은 이 시기 청주제일교회를 포함하여 여러 교회가 당한 수난을 보여 주고 있는 내용들이다.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37년 일경에 의해 구속된 바 있는 박상건 목사는 총회와 노회적 차원에서 밀어닥치는 물결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노회 차원에서 신사 참배를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신앙적 절개는 변함이 없었다. 충청노회장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그였기에 일제 당국은 그를 특별히 감시하면서 “신사참배를 수용하든지, 아니면 청주를 떠나라”며 압박을 가해왔다. 그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양떼와 교회를 뒤로 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교회를 존속시키는가, 아니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회를 폐쇄시키는가 하는 양자택일만이 교회 앞에 놓이게 되었고, 일제 당국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회가 있으면 무조건 교회를 폐쇄시켰기 때문에 박상건 목사는 야반에 만주로의 망명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추진하고 있던 교회 건축도 자연 미루어지게 되었다.
박상건 목사의 순교
만주로 피신한 박상건 목사는 봉천노회에 들어가 1939년 4월에 하얼빈 교회에 부임하였고 그곳을 중심으로 만주 땅에 복음을 전했다.
그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당시 해방된 우리나라는 각 방면으로 전도의 문이 열렸다. 법무부에서는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형무소 목사제도를 두었는데, 박 목사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 목사로 임명되어 감옥 전도에 열중했다. 아직 안정되지 못한 사회 질서, 거기에 좌·우의 사상적인 대립 등으로 감방에는 죄수들이 넘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그는 교도 목사로서 감방의 죄수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뿐만 아니라 직원들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을 통해 교도소 전도 사역을 활발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런데, 1950년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6월 28일 새벽, 서울에 입성한 공산군은 형무소의 문을 열어 제치고 죄수들을 모두 석방하고, 형무소에서 일하던 목사들은 모두 납치해 갔는데, 이때 박상건 목사 또한 공산기관인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교묘한 방법의 회유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순교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순교자로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