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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광고등학교를 설립하다.
교회희년 축하예배를 드리다.
청신고등공민학교 인수하여 운영하다.

 

1953년 교회 희년(禧年) 기념행사

1953년은 청주제일교회가 50세, 곧 희년이 되는 해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장 1 - 3절 )

이라고 하고 있듯이 안식년의 7회를 거듭한 다음해인 50년을 희년(禧年)이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에는 나팔을 크게 불어 희년을 고하여 복된 해의 소식을 전하였다. 이 해에는 토지를 불경휴식(不耕休息)하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토지도 잃어버린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며 본래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그런 해이다. 

1953년에는 교회 창립 희년 감사의 해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하였다. 먼저 10월 26일부터 ‘교회 창립 희년기념 부흥회’를 실시하였다. 초빙된 강사는 구성서(具聖書)목사였다. 그리고 희년기념 사업으로 북문교회 예배당 신축을 위해 특별헌금으로 10만원을 지원하기로 가결하기도 하였다1)

그리고  1953년 11월 1일, 첫째 주일에  지난날의 하나님 섭리를 감사하면서 희년기념 축하예배를 성대히 드렸다. 희년기념식을 기하여 교회 근속자와 초대 교회 교인을 표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구연직목사 근속 15주년 기념  

② 이상필 장로 근속 20주년 기념

③ 방흥근씨 본 교회 설립당시 초대집사

④ 한경주. 양경신. 배숙현. 정순례 여집사 근속20주년 기념


구연직목사에 대해서는 근속 15주년을 기념하여, 이상필 장로에 대하여는  근속 20주년을 기념하여,  방흥근 집사에 대하여는 교회 설립 당시부터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청남학교를 세운 공적을 기념하여, 그리고 한경주 양경신(이경재 장로의 어머니, 이병준 장로의 부인), 배숙현(이동현의 부친, 이영옥, 영태의 어머니, 이차례의 어머니), 정순례(이창수 장로의 어머니) 등 여 집사들에 대하여는 근속 20주년을 기념하여 각각 표창하였던 것이다.

 

 세광고등학교를 설립하다.
세광 고교 대성동으로 이전-대성동 시대 개막

세광고등학교 이전: 카나다 선교부의 건축비(4만달러 )보조를 받아 대성동 번지 땅 일대에 고등학교 건물을 신축하였다. 공사는 1959년 3월 16일 에 공사를 시작하여 1960년 10월 17일에 준공하였는데, 이로써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학교가 건설되었다. 10월 29일에는 준공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날 사회는 청주제일교회 목사요 세광학원 이사장으로 있던 구연직 목사가 담당하였다. 묵도와 찬송(549장)이 있은 후 기장 총회 총무로 있던 서정태 목사의 기도가 있었다. 홍정흠 목사의 성경봉독(시편 24:1-6)에 이어 길진경 총회장의 멧세지가 있었다. 이어 건축위원회 서기 겸 회계였던 최인호 장로(세광고교 서무과장)가 건축보고를 하였다. 당시 세광고등학교의 본관 건축은 벽돌 2층 건물 1동으로 연 건평 380평이었고, 건축 설계는 이문수, 공사 도편수는 윤태경이었으며, 공사비는 캐나다 선교회(기장 총회)의 보조금 39,000,000환과 재단 지원 12,452,00환, 총 51,452,000환이 공사비로 소요되었음을 보고 하였다.

 

 

청주 최초의 고등공민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

교회 및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던 공민학교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고 또한 가장 활발한 것은 청주 시내에 있던 청신고등공민학교이다. 청신고등공민학교는 청주YMCA가 펼친 주된 교육 사업 중의 하나로,  1950년 3월 15일 충청북도 도지사의 인가(충북 제21호)를 얻어, 그해 5월 1일에 개교한 공민학교이다. 청주시내 및 청원군 일대 일부 농촌 지역에 살면서 초등학교 졸업 후 가사가 빈곤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거나, 낮에 직장에서 일하는 소년 소녀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중학교 과정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대부분 가정환경이 불우한 소년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인물로 육성되도록 함과 동시에 그 배운 지식과 기능을 실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직업을 개척하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 학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랑에 접촉시켜 양심적이고,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인물을 육성함을 목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했다. 청주시내 및 청원군 일부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이 빈곤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낮에 직장에서 일하는 소년소녀와 무직 소년들로, 20세 미만의 자들을 야간에 모아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었다.

그러나 개교 직후, 불의의 6․25 전쟁을 맞아 부득이 휴교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이듬해 곧 1951년 11월 1일 청주제일교회 구내의 망선루에서 학생 30명으로 다시 개교했다. 이 학교는 6․25 전쟁으로 사회는 어지러워졌고 이로 인해 불우 아동, 구두닦이, 신문팔이 및 가정부에 이르기까지 배움에 굶주려 몰려든 이들에게 배움의 꿈을 안겨다

 이것은 1950년에서 1984년까지 34년의 역사를 가진 고등공민학교는 청주 지역 최초의 고등공민학교로,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3월 15일에 충북도지사의 인가(충북 제21호)를 얻어 그 해 5월 1일 본 교회 구내에 있던 망선루에서 개교했다

이 학교는 청주 YMCA가 교육 사업의 일환으로 개설한 것으로, 이것은 과거 청신여학교, 청신사설강습회 등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청신고등공민학교라’는 명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청신 고등공민학교가 1953년에 제일교회로 이양되었다. 

제일교회와 청주 와이와의 관계를 보면, 초창기 청주YMCA 사무실은 본 교회 구내의 망선루에 있었다. YMCA 이사진 가운데 본 교회 출신이 많이 들어가 활동하였고, 고등공민학교 교사는 거의 본 교회 교인 및 청년들이 맡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 YMCA 활동의 중심은 본교회가 되었다.

당시 일부 청년들은 이 고등공민학교를 청년회 사업으로 운영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YMCA 창단 주요 멤버 중 본 교회 출신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사업을 YMCA 주요 사업으로 주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60년 9월 1일에는 학교 운영권이 YMCA에서 청주제일교회 청년회로 넘어갔다. 교육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YMCA가 학교를 창설하기는 하였으나, 초대 교장이 된 강태승을 비롯하여 교육을 담당하던 교사들이 대부분 청주제일교회 청년들이었고, 교사로 사용하던 망선루나 세광중학교 건물도 모두 제일교회와 직접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청년회에서는 실질을 숭상하여 청주제일교회가 운영권을 가짐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청주제일교회가 청신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약 2년을 운영한 후인 1955년도부터는 교회에서 경영하던 청신고등공민학교 경영권을 세광중학교로 이양하여 주었다.

 

 

세광고등학교의 출범

 

세광고등학교 설립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중학교의 설립 경우와 마찬가지로 학교설립요건의 필수 요건 즉, 수익용 자산을 확보하는 일과 교사(校舍)를 구하는 것이었다. 교육용 기본 자산은 충북 노회 산하의 교회 부지나 부동산을 이용할 수 있었으나 수익용 자산은 그럴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설립의 첫걸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해결책은 역시 이상필 장로로부터 나왔다. 이미 중학교 설립 당시 오창 지역의 전답을 기부하여  중학교 설립을 가능하게 하였던 이상필 장로는 재단 이사로서 고등학교 설립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자신이 경영하던 ‘삼성목재공업소’를 세광고등학교 수익용 자산으로 기부 채납하는 용단을 내렸다. 당시 청주시 석교동 42번지에 소재한 ‘삼성목재공업소’는 청주지역의 큰 기업체로 보통의 결단이 아니고는 기부할 수 없는 사업체였다.

 세광 중고등학교 설립의 산파 역할을 한 이상필 장로는 오창 지역의 지주 출신으로

자신의 재산이 결코 개인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재산이라는 청지기 신앙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자신의 재산이 하나님 사업에 쓰여져야 한다고 인식하고 교회와 육영사업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다하였던 것이다. 1909년 민족의식의 색채가 강했던 보성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이상필 장로는 이후 청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사업을 벌이는 한편, 청주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특히 도청 산림과장으로 근무하던 동생 이상인씨의 권고로 부산고무공장의 청주특약점을 개설하여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1) 1931년 청주제일교회의 장로로 피택된 이상필 장로는 탑리교회를 개척 발전시키는데 앞장섰으며 용암 지역과 외평지역에 교회를 개척, 사재를 들여 전도인을 파송하여 약한 교회를 도와주는데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2) 청주 제일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면서 교회의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역할도 감당하여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때까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일제시대 청주제일교회가 운영하던 청남학교에 애착을 갖고 있었던 이상필 장로는 학교를 통한 육영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47년 구연직 목사, 홍청흠 장로와 같이 세광중학교를 설립하는데 의기투합한 것도 평소 육영사업에 대한 그의 열정이 반영된 것이었다.3) 이상필 장로는 1952년 1월 세광고등학교 설립이 난관에 처하자 자신의 가장 애착을 갖고 있던 사업체인 삼성목재공업소를 쾌척, 다시 한번 육영사업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상필 장로의 헌신적 열정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세광학원의 역사는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상필 장로의 공로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문교부의 학교 설립에 따른 기본 문제가 해결되자 다음으로 제기된 어려움은 교사(校舍)로 쓰일 건물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북장로교 청주 지부에서 사용하던 건물 즉, 청주시 탑동 195번지 소재의 미 선교부 선교병원 건물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고민을 거듭하던 중 흙벽돌의 새 건물을 신축하기로 하여  충북노회 각 교회 별로 건축헌금을 모금하는 한편 신축부지를 물색하였다. 그 결과 1952년 2월 시 소유 토지 1598평과 묘지 터 2788평을 구입하였으며 아울러 중학교의 교사 마련을 겸하여 청주극장을 인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정이 뜻대로 될 수는 없었다. 6.25의 전시체제에서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의 난관과 시행착오 속에 일단은 개교부터 하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결국은 1953년 2월 2일자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세광고등학교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세광중학교의 출범이 광복된 새 조국의 근대화라는 벅찬 꿈을 안고 출발한 것이라면, 세광고등학교의 출범은 전시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민족의 통일이라는 사명감 속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문교부의 인가 속에 세광고등학교는 1953년 4월 1일 대망의 첫걸음을 내딛으며 개교하였다. 교사를 구하지 못한 채 신입생을 받게 되어 임시방편으로 교회 내 임시교실을 만들어 수업을 하기로 하였다. 개교한 세광고등학교의 교장으로는 이태희 교장이 부임하였고 16명의 교직원과 130명의 학생이 역사의 첫 걸음을 같이 하였다. 당시 학생 중 기독교인이 50여명으로 조사되었는데 바로 이들이 앞서 언급한 세광고등학교 설립진정서를 제출하였던 학생들로 보인다.4)

  초대 교장으로 부임한 이태희 교장은 청년 시절부터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인물로 세광중고등학교 설립의 산파역을 담당한 이상필 장로의 장남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 이상필 장로의 육영사업에 대한 의지를 이어 받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부강초등학교에 근무하다 다시 학업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서울 문리대에서 수학하였다. 서울문리대 졸업 후 이태희 교장은 여러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새로이 출범한 세광중학교에 근무하다, 1953년 세광고등학교가 개교하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이태희 교장은 전시체제 하에 출범한 세광고등학교를 특유의 추진력으로 강력하게 끌고 나갔다. 한편으로는 인재를 구하는데 관심을 쏟아 헌신적이고 훌륭한 교사를 채용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태희 교장의 강력한 추진력, 초대 교사들의 헌신적인 열정, 학생들의 충만한 학구열이 서로 하나가 되면서 전시 하의 어려운 세광고등학교는 힘차게 출발하였다.



1) 이창수, 1992, 《초대교인들의 면모》, p 13 이창수 장로는 1950년대 세광학원의 재단 이사  및 서기를 맡아 초창기 세광학원 이사회의 기록을 담당한 세광 역사의 산증인이다.

  2) 안재명, 1999, 《충청지역에 복음이 들어온 이야기》,  pp 155 - 158. 주성인쇄사

  3) 세광 50주년을 회고하며』-이윤희 장로 회고내용- ( 2002년, 7월, 22일 인터뷰).이윤희장로는 이   상필 장로의 조카로 1955년 세광중학교에 부임한 이래 1990년 세광중학교 행정실장으로 퇴임하   기까지 35년 간 세광학원에 헌신한 대표적 인물이다.

4) 한국기독교장로회 충북노회, 1991, 《충북노회록》.Ⅰ권. p 13. 동해사 (이하 《충북노회록》으로

    약칭)


 


 

제목
교회 전체 연혁
1904년11.15 청주읍교회를 설립하다.
1904년 청남학교를 설립(현 청남초등학교) 하다. file
1928년 당회조직하고 덕촌교회을 개척하다.
1936년 김영로목사 사임하다.박상건목사(8대) 취임하다 file
1910년 박정찬목사 초대목사로 취임하다.
1911년 오죽교회를 개척하다.
1912년 박정찬목사 사임하다. 이원민목사(2대) 취임하다.
1913년 최영택장로 장립(최초의 피택장로)하다. 부인 전도회를 조직하다 file
1914년 이원민목사 사임하다. 황준국목사(3대) 취임하다.
1915년 곽경환, 이동순 장로 장립하다.
1917년 소민병원를 건축하다. file
1918년 황준국목사 사임,최영택목사(4대) 취임.김정현, 김중원 장로 장립,청년전도부를 조직하다.
1919년 3.1만세 운동 전개를 시도하다 실패하다.남자 전도회를 조직하다 file
1920년 외덕교회를 분립(현 우암교회),김태희, 최원진 장로 장립,예배실 남녀 좌석 구분 휘장를 철거하다.
1921년 최영택목사 사임,황청교회 개척를(현 상야교회)하다.
1922년 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file
1923년 망선루를 본 교회내로 옮기다.함태영목사 총회장(제 1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24년 서상필 장로 장립(10.1)
1928년 함태영목사 사임.경환목사(6대) 취임.하기 아동성경학교를 개최하다. file
1929년 상당유치원를 개원하다. file
1931년 이상필장로 장립하다.
1932년 경환목사 사임,김영로목사(7대) 취임,부속건물 신축(목사관,전도실,유치원)를 하다
1934년 창립30주년 기념행사, 제2교회(현중앙교회)분립하다. file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1938년 구연직(9대) 취임하다. 송재경, 안희상장로 장립하다.
1939년 현 예배당를 착공하다. file
1940년 현 예배당를 완공되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file
1941년 충청성경학원를 설립하다
1942년 선교사들 철수하다.
1945년 Y.M.C.A를 설립 하다. 소년,소녀 면려회를 조직하다. file
1946년 충북노회를 조직되다. 초대 노회장으로 구연직목사 피선되다.
1947년 학생성가대 조직(메시야성가대)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 구연직목사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 반공투쟁 주도하다.
1948년 이창수, 홍청흠장로 장립 하다.
1949년 교회증축공사를 착공하다. 세광중학교를 설립하다.(9.15)
1950년 학생회 '성종' 창간호를 발간하다.
1951년 교회 증축공사를 완공하다. 주보 창간호를 발간(10월 7일 제 1호)하다. file
1952년 북문교회를 개척하다. 김현태장로 장립하다.
1953년 세광고등학교를 설립. 교회희년 축하예배. 청신고등공민학교 인수하여 운영하다.
195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다. 박찬석장로 장립하다.
1956년 최초의 표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제정, 남산교회를 개척,박종헌장로 장립하다.제5회 기청 전국교육대회 유치
1957년 구연직목사 총회장(제 4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58년 박기순,박윤이,오성애,이삼례,장복덕, 조윤순 안수집사에 취임하다.
1960년 세광고교 대성동으로 이전하다. file
1961년 구연직목사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 조선출목사(10대) 취임하다. file
1962년 최인호, 김영훈장로 장립하다 file
1963년 노준성 이명수 한기창장로 장립하다. file
1964년 조선출 목사 사임, 안봉걸목사(11대) 취임, 교회창립 60주년 기념행사, 청주제일교회가 제정 file
1966년 안봉걸 목사 소천하다. 강신정 목사(12대) 취임하다. file
1968년 이태희 엄평우장로 장립 file
1969년 강신정목사 사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