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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05대(1919-1923)함태영목사.jpg

(1) 제5대 함태영 목사 부임

1923년 함태영 목사는 청주읍교회 제5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신학생으로

남대문교회 조사로 활동하던 그는 목사로 부임하기전 이미 청주읍교회에서 1922년 6월 이전부터 조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감사할 일 : 각 교회가 주 은혜 중 평안히 지내오는 중 교유들이 신령한 재미를 얻어 믿음이 굳게 되오며 새로 열심과 전도의 새 소망이 많사오며 청주읍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 함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으며 함태영 장로를 청빙하여 조사로 사역하게 된 일과 새로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많이 증가되오며...”1)

그는 1922년 평양의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23년 1월 7일에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청주읍교회에서 목사 1인 청원 : 청주읍교회에서 신학 졸업생 함태영씨를 위임 목사로 청빙할 일과 피택 장로 이호재씨와 괴산읍교회에서 피택장로 김주현씨를 장립하였사오며 보은읍교회와 원평리교회에서 각각 장로 1인식 택할 일이오며...2)

이미 조사로 시무하며, 신학교를 졸업한 함태영은 목사 안수 받은 후 청주읍교회 목사로 시무하도록 내정되었다. 승동교회에서 개최한 경기충청노회 제23회 노회에서 함태영은 목사로 안수 받는다. 그리고 1923년 1월에는 소열도 목사 위임 동사목사로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함태영 목사는 1923년 1월 7일 오후 2시에 목사 위임식을 가졌다.

사회는 소열도 목사였으며 이명혁 목사가 강연하였다. 사회자가 함 목사와 교인들에게 문답하였으며, 그 후에 안대선 목사는 함목사에게, 소열도 목사는 교인들에게 각각 권면의 말씀을 하였다. 이후 함목사 축복 기도로 마쳤는데, 이날 참석한 내빈으로는 노회에서 파송된 이명혁, 안대선, 곽경한, 김주현 등 여러 목사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날 약 300여명이 모여 위임예배를 드렸던 것이다.1).

시 청주선교부는 로간 부인의 별세2)와 계군 목사의 사임3)으로 선교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였고, 청주읍교회 또한 최영택 목사의 사임으로 목회자의 공백 상황으로 함태영 목사의 부임은 큰 힘이 되었다.

(2) 함태영 목사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사, 독립운동가, 법조인, 정치인 함태영(咸台永 ; 1873~1964, 호는 松岩)은1873년 12월 2일 함경북도 무산(茂山)에서 부친 함우택(咸遇澤)과 모친 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4).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부친 함우택의 무과 급제로 1889년(고종 26년) 관직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한국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제1회 졸업생에는 이준 열사도 있다. 이후 1907년까지 13년 간, 한성지방 재판소 검사 시보, 판사, 검사, 고등 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대심원 판사 등을 거쳐 통감부 시대에는 경성공소원 판사, 경성복심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지조로 사법권 독립을 위해 싸웠고 강직한 성품으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 복직을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피검된 이상재를 엄벌하라는 법무부대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법 집행을 했다. 이 일로 파면되었다 곧 복직되었다. 또한 사형 언도된 이승만의 형량을 7년으로 감형시킨 일도 있었다.

4) 함태영 목사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1959년 시사시보사 출판국의 <3․1운동사 취조서(1920. 3. 3)>에는 본적-경성부 숭삼동 1백5번지, 주소-경성부 남대문통 5정목 70번지로, <경성지방법원 예심계 조서(1920. 7. 21)>에는 본적-경성부 숭삼동 1백7번지, 출생지-함경북도 무산군 무산면, 주소-경성부 남대문통 5정목 70번지로 기록되었다. 최근에는 함태영 목사의 출생지가 김제라는 설이 있어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 운동 공적을 기려 1994년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에 함태영 목사 출생지 기념비를 세웠다. (김병학,『김제의 문화유적』1995.)

그는 연동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부친을 따라 일찍이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36세 되던 1908년 복부내종(腹部內腫)으로 사경을 헤메다 기도의 힘으로 낫는 체험으로 더욱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이후 연동교회 집사로, 1911년 8월에는 연동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5년 경충노회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신학교 재학 중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로 임명(1918년)되어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 때에 남대문교회 교인인 이응설, 이갑성 등과 교분을 갖고 이들과 함께 3․1운동 기독교 측의 주요 추진 세력으로 활약하였다.1) 그의 집은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는 민족 대표 48인 중 한명이었으며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도 있었다. 민족 대표 서명인 33인 중에는 빠져 있으나, 해외에 나아가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임무를 수행하였기에 역사가들은 그를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지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3․1운동에서 그의 활약으로 기독교 각 교파간의 연합 및 기독교․천도교․불교와의 제휴가 가능하였다고 보고 있다.

1920년 9월 그는 경성복심원에서 손병희․최린․권동신․오세창․이종일․이일환․한용운 등과 관련자 중 최고형인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2)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1921년 12월 가석방되었다. 이후 신학을 계속하여 1922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해 12월에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했다.

(3) 함태영 목사의 사역과 교회 부흥

함태영 목사는 1922년 조사로 청주읍교회에 부임하여 그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소열도 선교사와 동사목사로서 부임하였다. 그는 1928년 마산 문창교회로 이임하기까지 7년간 목회하며 교육과 청년 운동과 일꾼 세우는 일과 교회 환경 개선에 노력하였다.

그는 1923년 부인전도단을 조직하였고, 장로 이호재를 조사로 채용하여 전도를 확대하였다. 그의 부임으로 청주읍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


2) 그는 공판 중에도 독립 운동에 관여한 사실을 떳떳하게 증언하였으며, 독립의 시기를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 독립의 성공은 시세와 기회와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라고 신앙인의 자세로 답변하였다.

“감사할 일 : 각 교회가 주 은혜 중 평안히 지내오는 중 교유들이 신령한 재미를 얻어 믿음이 굳게 되오며 새로 열심과 전도의 새 소망이 많사오며 청주읍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 함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으며 함태영 장로를 청빙하여 조사로 사역하게 된 일과 새로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많이 증가되오며...


 


제목
교회 전체 연혁
1904년11.15 청주읍교회를 설립하다.
1904년 청남학교를 설립(현 청남초등학교) 하다. file
1928년 당회조직하고 덕촌교회을 개척하다.
1936년 김영로목사 사임하다.박상건목사(8대) 취임하다 file
1910년 박정찬목사 초대목사로 취임하다.
1911년 오죽교회를 개척하다.
1912년 박정찬목사 사임하다. 이원민목사(2대) 취임하다.
1913년 최영택장로 장립(최초의 피택장로)하다. 부인 전도회를 조직하다 file
1914년 이원민목사 사임하다. 황준국목사(3대) 취임하다.
1915년 곽경환, 이동순 장로 장립하다.
1917년 소민병원를 건축하다. file
1918년 황준국목사 사임,최영택목사(4대) 취임.김정현, 김중원 장로 장립,청년전도부를 조직하다.
1919년 3.1만세 운동 전개를 시도하다 실패하다.남자 전도회를 조직하다 file
1920년 외덕교회를 분립(현 우암교회),김태희, 최원진 장로 장립,예배실 남녀 좌석 구분 휘장를 철거하다.
1921년 최영택목사 사임,황청교회 개척를(현 상야교회)하다.
1922년 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file
1923년 망선루를 본 교회내로 옮기다.함태영목사 총회장(제 1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24년 서상필 장로 장립(10.1)
1928년 함태영목사 사임.경환목사(6대) 취임.하기 아동성경학교를 개최하다. file
1929년 상당유치원를 개원하다. file
1931년 이상필장로 장립하다.
1932년 경환목사 사임,김영로목사(7대) 취임,부속건물 신축(목사관,전도실,유치원)를 하다
1934년 창립30주년 기념행사, 제2교회(현중앙교회)분립하다. file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1938년 구연직(9대) 취임하다. 송재경, 안희상장로 장립하다.
1939년 현 예배당를 착공하다. file
1940년 현 예배당를 완공되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file
1941년 충청성경학원를 설립하다
1942년 선교사들 철수하다.
1945년 Y.M.C.A를 설립 하다. 소년,소녀 면려회를 조직하다. file
1946년 충북노회를 조직되다. 초대 노회장으로 구연직목사 피선되다.
1947년 학생성가대 조직(메시야성가대)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 구연직목사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 반공투쟁 주도하다.
1948년 이창수, 홍청흠장로 장립 하다.
1949년 교회증축공사를 착공하다. 세광중학교를 설립하다.(9.15)
1950년 학생회 '성종' 창간호를 발간하다.
1951년 교회 증축공사를 완공하다. 주보 창간호를 발간(10월 7일 제 1호)하다. file
1952년 북문교회를 개척하다. 김현태장로 장립하다.
1953년 세광고등학교를 설립. 교회희년 축하예배. 청신고등공민학교 인수하여 운영하다.
195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다. 박찬석장로 장립하다.
1956년 최초의 표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제정, 남산교회를 개척,박종헌장로 장립하다.제5회 기청 전국교육대회 유치
1957년 구연직목사 총회장(제 4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58년 박기순,박윤이,오성애,이삼례,장복덕, 조윤순 안수집사에 취임하다.
1960년 세광고교 대성동으로 이전하다. file
1961년 구연직목사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 조선출목사(10대) 취임하다. file
1962년 최인호, 김영훈장로 장립하다 file
1963년 노준성 이명수 한기창장로 장립하다. file
1964년 조선출 목사 사임, 안봉걸목사(11대) 취임, 교회창립 60주년 기념행사, 청주제일교회가 제정 file
1966년 안봉걸 목사 소천하다. 강신정 목사(12대) 취임하다. file
1968년 이태희 엄평우장로 장립 file
1969년 강신정목사 사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