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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304 1929년 상당유치원를 개원하다.

2012.01.17 10:36

조회 수:399

    214] 상당유치원 원장 한부선 선교사 송별기념 1936.9.21.jpg


217] 상당유치원 4회 졸업기념-1 1934.3.15.jpg


323] 상당유치원 제 6회 졸업식 1936. 3.6.jpg


Resize of 213] 상당유치원 제8회 재원생일동 (구 예배당 앞에서) 1937.4.jpg


상당유치원 소풍 1943.5.jpg


상당유치원 우암산 소풍 1942.jpg


졸업증서(김용섭) copy.jpg


상당유치원 개원

이미 충주, 제천, 음성 등지에 이 유치원이 개원되고 있는 상황에서 청주읍교회에서는 거기에 자극을 받아 다시 유치원 개설 움직임이 일어났다.

조관식, 조운선 등이 유치원 설립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 탑리 교회에서 이사하여 온 이상필이 합세함으로 유치원 개원 문제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에 교회 재정 형편상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청주읍교회 담임 목사인 경환 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교인들의 협력과 청주선교부의 한부선(Bruce F. Hunt:韓富善) 목사 및 선교사 부인들의 도움으로 유치원 개설 문제가 실마리를 풀어갔다.

1929년, 교회에서는 청주선교부한테서 재정 후원을 받기로 하고 가을에 유치원 설립 허가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0년 2월에 마침내 당국의 인가를 받아, 그 해 3월 5일 “상당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청주읍교회에서 개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인 유아를 대상으로 한 이 고장 최초의 근대적인 유치원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청주읍내에 유치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1926년에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청주유치원”이 개설되어 있었다. 한일 합방 이후 청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전체 인구의 25%를 상회할 정도로 증가하였으므로,1) 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유치원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청주유치원은 어디까지나 일본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개설된 유치원이었기 때문에 한국인 자녀들은 입학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2)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귀족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중류 이하의 가정에서는 보내기가 좀처럼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히 한국 유아들은 유치원 교육을 받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것도 일본 총독부 정치하의 일본식 교육으로, 한국 고유한 언어와 문화 전통은 익힐 수 없어, 의식 있는 사람이면 기피하는 경향이 많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며, 한국을 위할 줄 아는 참된 어린이를 키울 수 있는 유치원이 설립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첫 개원이지만 60명이나 되는 많은 한국 원아들이 상당유치원에 입학했다. 교회를 통한 상당유치원의 설립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이 지역 유아교육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 상당 유치원은 앞서 언급한 한부선(Bruce F. Hunt:韓富善) 목사를 원장으로 하여 개원했다. 한부선 목사는 1928년 청주선교부에 임명되어 1936년 만주로 떠나기까지 약 8년 간 청주지역 선교사업에 크게 활약하였는데, 그는 유치원사업에 남달리 관심을 가진 선교사였다.

원아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는 보모들도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고 자질을 잘 갖춘 전문 교사가 배치되었다. 초기에는 보모 1인이 교육을 담당했고, 1934년 경 이후에는 보모 2인이 배치되어 원아들을 돌보았는데, 그 중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보모는 경성보육학교 사범과 출신으로 교육학, 보육학, 음악, 율동, 미술 등에 익숙하고 물론 악기(풍금)도 잘 다루던 유능한 전문 보육 교사였다 한다.


3) 유치원 건물 신축

상당유치원은 개원 초, 독립된 건물을 소유하지 못하고 청남학교 건물 곧 망선루를 사용했다. 이로 인하여 교육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았는데, 2년 뒤인 1932년에 아담한 유치원실을 망선루 서쪽 옆에 신축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와 연희전문의 교수직을 대기하고 있던 민중식(閔仲植)이 청주읍교회 김영로 목사한테 유치원 교육장의 사정을 듣고, 유치원 신축자금으로 7만원을 자진하여 기부하였는데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한부선 선교사도 보조금으로 4만원을 헌납했고, 이 자금들을 기반으로 이전의 목사관 자리에 현대식 유치원 건물을 신축하여 독립된 건물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3) 그 후 상당 유치원은 1973년까지 청주제일교회에 부설되어 40여 년간 청주 유아교육의 요람이 되어 왔다.

유치원 원아 수를 보면, 개원 시기에는 60명이었으나, 그 후에는 몇 명이었는지 현재 확실히 잘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유치원 졸업기념사진이나 소풍 갔을 때 찍은 기념 사진에 의해, 초창기는 대개 60명가량의 원생이 수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차차 인원이 증가하여 1936년경 이후부터는 1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4)


4) 교육내용 및 활동

상당 유치원의 교과과정과 교육 내용은 자료 부족으로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30년대 상당 유치원을 졸업한 졸업생의 증언에 의하면, 대개 노래(동요), 유희, 그림 그리기, 만들기 등이 주요 과목으로, 유아 단계에서의 심신 개발과 건전한 생활 태도 함양에 힘을 기울여 교육했다. 노래는 우리 고유의 동요를 가르쳤고, 틈틈이 재미있는 동화시간을 마련하여 원아들을 관리하였는데, 이때에는 조선의 정서를 담은 동화를 들려줌으로써 당시의 어린이들에게 은근히 민족의식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 합리적인 생활 태도, 보건․위생 생활 등을 어려서부터 몸에 익힘으로써 건실한 사회인으로 자라도록 교육했다. 옷 입기, 이부자리 개기 등 자기가 할 일은 자기 스스로 하는 생활습관을 길러 주었고,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고, 식사 후에는 곧바로 양치질을 하도록 가르쳤으며, 가끔 손톱검사도 실시하여 청결과 보건․위생의 생활을 익히도록 했다.

또한 유치원에서 개최되는 운동회, 소풍, 어머니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축하 발표회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하여 어린이들의 재능을 개발하고 꿈과 낭만을 키워주었다. 이것은 단순히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학부형 그리고 지역사회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러한 행사에서 나타난 율동, 음악, 연극 등의 활동은 사회의 근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 때 발표되는 상당유치원 어린이들의 재롱 섞인 율동과 촌극 등은 학부모와 교인들은 물론 청주 시민들에게까지도 화제가 되었으며, 어린이 문화운동측면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 한 가지 흥미 있는 일은, 어려서부터 절약과 저축정신을 길러주기 위하여 원아들이 유치원에 입학하면 동시에 통장을 소지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중앙공원 앞에 있는 상당금융조합에 입금하여 통장을 개설하고, 매월 정기적으로 용돈을 모아 저금하도록 했으며, 학교에서는 원아들에게 각각 도장을 한 개씩 새겨 주어 자긍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이 유치원에서 특히 주목할 일은 "上黨幼稚園"이라는 명칭이다. ‘상당’이라는 용어는 주지하다시피 백제 시대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지역 전통적인 역사 문화성을 가지고 있는 용어이다. 일제가 민족 말살정책을 취하여 민족문화를 억압하던 그 시기에, 미래의 민족 棟梁材를 교육하는 유치원에서 민족 전통적인 용어 “상당”이라는 명칭을 굳이 사용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려 한 것이다. 그 당시 당국에서는 여러 차례 ‘상당’이라는 명칭을 바꾸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그대로 고집하여 사용했다는 사실도 민족의식과 결부시켜 주목해야 할 일이다.5)

상당 유치원은 이렇게 일제 치하에서 어린이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킴으로써 민족독립의 역량을 키워갔으며, 또한 부모들에게는 각종행사와 교양교육을 실시하여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다.


1) 청주의 인구는 매년 증대하여 갔는데, 1922년의 청주면의 호구와 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청주면의 호구수 및 인구

(1922년 6월 현재 )

 

호 구 수

인      구

남  자

여  자

합  계

일  본  인

    640

   1,148

   1,141

  2,289

한  국  인

  1,469

   3,600

   3,268

  6,867

중  국  인

    26

     121

       8

   129

구  미  인

     3

       3

       5

     8

계 

  2,138

   4,872

   4,421

9,293

(『청주연혁지』, <1923>, pp. 167~168.)

 

2) 1930년의 통계를 보면 청주유치원의 학생 수가 50명이었는데, 그 중 일본인 유아는 48명(남 22, 여 26)이었고, 한국인의 유아는 겨우 남학생 2명뿐이었다.

3) 이창수,『회상록』, p. 37.;『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 21회 회의록』충청노회상황보고(1932),;『충북노회사료집』p. 209.

 

4) 1934년 소풍기념사진에는 59명의 원생이 참여했고, 1936년 소풍기념사진에는 68명의 원생을 헤아릴 수 있다. 제 4회 졸업사진(1934. 3. 15)에는 졸업하는 원생 21명이 기념촬영을 했고, 제 6회 졸업사진(1936. 3. 6)에는 27명의 어린이들이 졸업장을 앞에 들고 사진 촬영을 했으며, 제 7회 졸업생(1937. 3.)은 48명이었다. 그리고 제 13회 졸업생(1943. 3.)은 42명이었다. 

5) 당시 “상당”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는 “상당유치원”, “상당 치과(원장 이세근)”, “상당금융조합” 등이 있었는데 여러 차례 명칭을 바꾸라는 일제의 압력이 있었다. 일제의 강요로 상당금융조합은 1938년 이후 청주금융조합과 합병되어 사라졌고, 상당유치원은 그대로 존재하여 해방 후에도 그 이름을 계속 그대로 사용하면서 유치원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오다가 1973년 결국 유치원 교육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배경은 시장 복판에 있어 통학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 이 당시 청주 지역이 발전하면서 거주지역이 주변 개발 지역으로 옮겨지고, 신흥 주택지역에 보다 좋은 시설을 갖춘 유치원, 유아원이 곳곳에 세워진 점  등이 있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청주제일교회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유치원 설치기준 문제를 거론하면서 간섭과 압력이 심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렇게 복합적인 배경 하에 그때까지 유지하여 오던 유치원 교육을 다른 신흥 유치원에 양보하고, 상당유치원은 개원 43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졸업증서(김용섭) copy.jpg
 

제목
교회 전체 연혁
2004년 100주년 기념행사 file
2004년 5월2일 리모델링 예배당 입당 감사 예배
2004년 1월 18일 명예권사 (22명) 취임하다
2003 김병완, 이승렬 장로로 임직, 김관화,김홍식,나채운,윤수영,이박희,조대선,차용출,최광석,황승일, 김숙자,남경우,박명옥,박순동,송형헌,양유자,오명희,유수복,유연희, 유용선,이광분,임명순,정순모,정영희,한길수(24분) 권사 취임하다.(4.26)
2003년도 이쾌재 목사 명예·공로목사로 추대,이건희 목사 담임목사로 취임하다(4.26)
2002년 청주제일교회 제규정집 제정하다(2월) 이윤희 장로 은퇴하다(12.29)
2001년 민노아관 준공식을 하다.(12월 16일) file
1979년 서도섭목사사임, 유병찬목사(14대) 취임, 장학위원회를 조직, 목사관 및 제일상가를신축하다. file
1978년 김창구권사 취임하다.
1977년 최동준 이영배 이윤희장로 장립, 김상기(남),권용희,김갑인,김복문,백경애,이삼례,이정림,장복덕,조윤순 권사 취임하다 file
1976년 청신고등공민학교 이수(세광학원에서 인수운영)하다. 최초 여신도회 분리조직
1975년 제1회 성곡의 밤을 개최하다.
1974년 교회창립 70주년 기념행사( (70년 약사 발간) , 김치덕 김송학 김갑영장로 장립 하다 file
1970년 서도섭목사(13대) 취임하다. file
1969년 강신정목사 사임하다.
1968년 이태희 엄평우장로 장립 file
1966년 안봉걸 목사 소천하다. 강신정 목사(12대) 취임하다. file
1964년 조선출 목사 사임, 안봉걸목사(11대) 취임, 교회창립 60주년 기념행사, 청주제일교회가 제정 file
1963년 노준성 이명수 한기창장로 장립하다. file
1962년 최인호, 김영훈장로 장립하다 file
1961년 구연직목사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 조선출목사(10대) 취임하다. file
1960년 세광고교 대성동으로 이전하다. file
1958년 박기순,박윤이,오성애,이삼례,장복덕, 조윤순 안수집사에 취임하다.
1957년 구연직목사 총회장(제 4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56년 최초의 표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제정, 남산교회를 개척,박종헌장로 장립하다.제5회 기청 전국교육대회 유치
195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다. 박찬석장로 장립하다.
1953년 세광고등학교를 설립. 교회희년 축하예배. 청신고등공민학교 인수하여 운영하다.
1952년 북문교회를 개척하다. 김현태장로 장립하다.
1951년 교회 증축공사를 완공하다. 주보 창간호를 발간(10월 7일 제 1호)하다. file
1950년 학생회 '성종' 창간호를 발간하다.
1949년 교회증축공사를 착공하다. 세광중학교를 설립하다.(9.15)
1948년 이창수, 홍청흠장로 장립 하다.
1947년 학생성가대 조직(메시야성가대)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 구연직목사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 반공투쟁 주도하다.
1946년 충북노회를 조직되다. 초대 노회장으로 구연직목사 피선되다.
1945년 Y.M.C.A를 설립 하다. 소년,소녀 면려회를 조직하다. file
1942년 선교사들 철수하다.
1941년 충청성경학원를 설립하다
1940년 현 예배당를 완공되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file
1939년 현 예배당를 착공하다. file
1938년 구연직(9대) 취임하다. 송재경, 안희상장로 장립하다.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1934년 창립30주년 기념행사, 제2교회(현중앙교회)분립하다. file
1932년 경환목사 사임,김영로목사(7대) 취임,부속건물 신축(목사관,전도실,유치원)를 하다
1931년 이상필장로 장립하다.
1929년 상당유치원를 개원하다. file
1928년 함태영목사 사임.경환목사(6대) 취임.하기 아동성경학교를 개최하다. file
1924년 서상필 장로 장립(10.1)
1923년 망선루를 본 교회내로 옮기다.함태영목사 총회장(제 1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22년 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file
1921년 최영택목사 사임,황청교회 개척를(현 상야교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