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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선루를 본 교회내로 옮기다.함태영목사 총회장(제 12회 총회)에 피선되다.

 

망선루의 이전

 

망선루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지하다시피 원래 고려 때 세워진 관아의 건물로, 청주 객관(客官)의 동쪽에 위치한 누각으로,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였다. 옆에 맑은 연못이 있고 사방이 훤히 트였다고 하니488) 이러한 곳에 세워진 2층 누각은 주변의 정취가 수려하게 보였으리라 상상이 되며, 모든 경치가 다 들어오는 곳이라 하여 ‘취경루’란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생각한다. 


14세기 후반,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난 갔다가 홍건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1361년(공민왕 10년)에 이 곳 청주에서 수개월 머물러 있으면서 청주에서 문과(文科)와 감시(監試)를 치르고 합격자 방(榜)을 이 취경루에 내 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 후 1461년 조선시대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중수할 때, 이 지역 출신 세도가인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망선루(望仙樓)라 고쳤다. 그 후 이섬(李暹)이 중수했고 다시 목사 이수득(李修得)이 보수한 바 있는 2층 누각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성안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성벽과 그 안에 있던 여러 건물을 헐어내고 대신 일본식 건물을 많이 세웠다. 1921년, 현 도청 서문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도로 확장공사와 일본 경찰서내 일본인의 검도와 유도를 연마하는 무덕전(武德殿) 신축을 구실로 역사적인 망선루를 헐었지만, 실은 우리의 문화재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망선루는 헐리게 되었다.


당시 망선루는 청주 여자공립 보통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 역사적인 건물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우리 문화 유산인 망선루가 일본에 의해 그냥 그대로 헐리어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된 김태희(청주 청년회 회장, 청주읍교회 교회 장로)는 민족문화 유산을 잘 보존함과 동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방안을 세웠다. 그는 정규택·김정현·이호재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청년들과 함께 망선루를 살리기로 결심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대금은 유지들이 조달하고 이전 작업은 청년회가 책임을 지며 그 건물은 교회구내에 복원하여 학교 건물로서 활용할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전 장소와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일단 인수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제에 의한 망선루 철거가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청주 청년회에서는 이 민족문화의 유산을 보전하기 위하여 뜻 있는 시내 청년들과 일반 유지들에게 모금을 호소했다. 그리고 고적 보존을 명분으로 충청북도 경찰국과 수의 계약으로 2천 원에 망선루를 인수하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철거했다. 헐린 건물에서 나온 목재며 기와들을 모아 옆 골목 공터에 쌓아 두었다.
일단 인수는 했으나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 간이나 복원사업이 추진되지 못한 체, 자재들은 공터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길가에 쌓아 둔 목재들이 망실되기 시작했다. 인근 사람들이 땔감으로 자져갔고, 또한 남아 있는 목재도 기둥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청년회장이자 청주읍교회 장로인 김태희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복원 문제에 대해서 청주읍교회와 본격적으로 협의에 나섰다. 내용은 건물을 교회구내 공터에 복원하여 청남학교 교실로 사용하고, 거기에 방 한 칸은 청년회 사무실로 사용한다는 방안이었다.
청주읍교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동의하게 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교회는 민족문화 보존과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고, 또한 청년회의 회원 가운데 그 교회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당시 김태희 회장은 청남학교 교감으로 있었고, 때마침 청남학교는 청신여학교를 합병하여 교실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선교부 및 교회와의 교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침내 교회에서 동의를 얻어 장소가 물색되었다. 교회 내 청남학교 운동장 북편에 있는 복숭아밭이 부지로 선정되어 그곳에 망선루를 복원하고, 그 건물을 학교 교실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거액의 복원건축비를 마련하는 재정적인 문제이었다. 이 건물을 이전하는 데는 총 공사비 1천 7백 원 정도가 있어야 했는데, 이 거액을 어떻게 충당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청주 청년회(회장 김태희 장로)에서는 망선루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 간이나 방치하여 두니 일부 기둥이 썩기 시작함으로 교회에 의뢰했습니다. 그 합의 사항은 방 한 칸은 청년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청신여학교가 통합되어 교실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청남학교에서 사용토록 교회와 합의했습니다. 건축비는 소열도 선교사 및 함(태영)목사와 상의하여 총 이전 건축비 1,700원 중 700원은 소열도 목사가 부담하기로 하고, 500원은 모금으로 충당하며, 나머지 부족액은 함 목사님이 서울에 가서 모금하여 오도록 합의했습니다. 함 목사님은 서울서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넘어져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망선루 이전 공사할 때에 재목을 운반하는데 마차를 연결시키고 소 두 마리가 끌도록 했는데, 재목을 운반하는 데만도 수일이 걸렸습니다.

라고 그 당시의 기억을 생생히 증언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소열도 선교사와 합의하여 총 공사비 1,700만원 중 700만원은 선교부에서 부담하기로 하고, 500만원은 모금하여 충당하고, 나머지는 함태영 목사가 서울에 가서 모금 해 오도록 했다.
한편 당시 망선루 이건에 관한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청주교회 교사신축
충북 청주읍교회에서는 본 교회 경영으로 교사 신축에 착수하여 거의 준공하게 되었다는데, 이제 그 건축에 대한 상황을 듣건대, 청년구락부에서는 구한국 관사를 매수하여 교회에 기부하였고, 신도들은 재목 운반하는 것과 건축 공사에 드는 시간과 금전을 담당하였으며 기타 비용과 기지대가는 학부형이 2분의 1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각 교회에서 연보를 거두어 보충할 터이라 하며 건축제도는 2층 양제에 장이 64척이요 광은 28척이라더라 491)

이를 보면 당시 학부형과 시민 그리고 여러 교회가 망선루 이건을 위해 합력하여 건축비용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벌였던 망선루 복원을 통한 민족 문화 보존 운동은 일제 때 청주의 민간단체가 벌인 최초의 시민운동이고, 나라 잃은 민중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민족 문화 운동이었으며, 자발적이고도 합법적인 애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전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회청년, 청남학교 학생, 교인들이 자재를 학교 구내로 옮겨 날랐다. 운반거리는 약 700∼800m인데, 기와, 석가래, 기둥, 자갈, 큰 돌 등을 마차에 실어 나르기도 하고, 또는 손수 운반하기도 하면서 보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이 때 마차를 연결하여 목재를 그득 싣고 소 두 마리로 끌도록 했는데, 목재를 운반하는 데만도 수일이 걸렸다고 한다. 
복원 건축에는 청부감독으로 김광현, 도목수로 정상필, 임호연,492)등이 맡아 수고를 했다. 그러나 건축 자재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철거되어 방치 된지 2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자재가 많이 없어졌고, 남아 있는 기둥도 일부가 부식되어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총 공사를 책임지고 진두 지휘하던 김태희 장로는 시내 ‘인천목재상’에 의뢰하여 신의주에서 목재를 주문하여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도 부족하고 그 자재도 그렇게 여의치 못했다. 그래서 원 자재의 썩은 부분은 잘라 내고 새로 가져온 목재를 잇대어서 기둥으로 사용했다.
복원 공사 때, 청남학교 학생들은 방과 후에 노력 봉사활동에 나섰다. 민족 문화 보존이라는 차원과 자신들이 사용할 교실을 짓는 일에 손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공사에 참여해 열심히 봉사했다.

 

복숭아나무를 베어 내고 동서 길이로 망선루를 세웠다. 목수가 주춧돌 세울 장소를 치수를 재어 표시하고, 인부들이 안에 들어가 넓이 1m, 길이 1.5m 정도로 구덩이를 파 놓는다. 그러면 하교하던 학생들이 달려들어 여기에 굵은 돌과 잔돌을 갖다 부어 넣었다. 그리고 비계(고층 건물을 지을 때 디디고 서도록 긴 나무와 널을 설치해 놓은 시설)나무틀을 차려 놓고 큰돌에 밧줄을 걸어서 비계나무에 달아 놓은 도르래에 걸고, 그 줄에 여러 갈래의 잔줄을 메어 놓는다. 우리 학생들이 잔줄을 잡으며 사방으로 고루 퍼져 서 있으면, 선소리 매기는 사람이 들어서서 다지는 큰돌의  방향을 잡으며 선소리를 매긴다. 선소리꾼이 “어이여 저차 -하! ”하면, 잔줄을 사방에서 잡은 우리들은 “지게미호”하고 줄을 잡아당긴다. 큰돌이 공중으로 따라 올라 갔다가 줄을 일제히 놓는 바람에 그 돌은 곧 바로 아래 구덩이 안으로 내려 떨어지면서 깔아 논 돌을 다져 준다. 이렇게 다져서 잔돌이 밑으로 들어가면 또 돌을 넣고 다지는데, 일정한 정도에 될 때가지 다져 놓는다. 무려 20여 개 구덩이를 여러 날에 걸쳐 오후부터 저녁 9시까지 다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기와 옮길 때 손 다친 학생도, 구덩이를 다지는데 손바닥이 부르튼 학생들도 많았다.493)

고 한 것을 보면 이 공사는 단순히 공사 인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수고와 땀방울이 초석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함태영 목사는 교사 신축 곧 망선루 이건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1924년 1월 3일 밤에 서울 종로 YMCA 회관에서 청남학교 신축 자금 마련을 위한 신년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청남학교 주최 신년 강연 성황 : 충북 청주 청남학교 주최로 대구여자학원 교사 이선애 여사와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 신흥우 두 선생님을 초청하여 시내 종로청년회관에서 지난 3일 하오 7시에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더불어 서울시 연동의 정신여학교 찬양대의 음악도 예정되어 있었음으로 시간 전에 장내는 입추의 여지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두 강사의 강연은 일반 청중에게 신년 초부터 새롭게 감명을 주었고, 찬양대의 음악은 만장의 갈채를 받았으며, 이렇게 하여 강연회를 마쳤는데, 당일 강연회를 주최한 청주청남학교를 위하여 금전을 기부한 인사의 성명은 다음과 같으며 입장료와 함께 수입된 금액이 380여원에 달하였다 한다.


함병철 100원.
서승원, 서병조, 김병찬, 김인규, 송진우, 유성준, 김필수
신흥우, 신필호, 정규환, 김일선, 박계양, 유병수, 각각 10원.
정종화 7원.
최인성, 장  준, 김태화, 유명근, 박규병, 김교준,이명원
이선애, 각 5원494)

위의 기사에 의하면 대구여자학원 교사 이선애 여사와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 신흥를 초청하여 신년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정신여학교의 찬양대가 찬양을 불렀고 강연이 끝난 후, 헌금을 하였는데 함병철을 비롯하여 23명이 낸 기부금이 277원이었으며 입장료 100여원을 포함하여 총 380여원이 모금되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함태영 목사의 주선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마침내 1924년 1월에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그때에 김태희, 김철환, 이동현, 이명구, 정규택, 김택, 뱍경학 등 청년회원 및 다수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복원된 망선루는 길이 64자, 폭 28자,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에 약 50여 평 면적을 차지한 2층 건물이 되었다. 이 망선루는 본래 위층 아래층이 툭 트인 2층 누각이었으나, 복원하는 과정에서 1, 2층의 사면 공간을 벽돌로 막고 창문을 내었다. 학교 교실로 사용하고자 함이었다. 목재를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만들었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는 조선식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내부 구조는 2층 양옥집과 별다를 게 없었다. 이 망선루가 청남학교의 교사기 되었다.
마침내 1924년 청남학교가 이 망선루로 이사하여 왔다. 아래층 중앙에 교무실을 두고 양쪽 동서로 교실을 배치했으며, 2층에 3개 교실을 마련했다. 학교 모든 시설을 이곳으로 옮김으로서 학교 면모를 일신했다. 다만 청년회의실은 아래 층 북편으로 별도로 입구를 내어 사용했다.


복원된 망선루는 이후 청남학교 건물로 사용(1924∼1938)되었다. 이를 통해 청남학교는 당시 유일한 청주 남녀 공학의 사립 초등학교로,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장소가 되었다. 이 건물은 그 외에 청주성경학원, 상당유치원, 야학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강연회, 한글 강습회 등 각종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YMCA회관, YWCA회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 청주삼각소년단(대한 보이스카웃의 전신) 등 여러 단체와 기관이 이곳을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망선루는 근대 교육의 산실이요, 일제 강점기 민족문화의 보루이며, 충북 교육·문화의 요람지다.

 

함태영 목사 제12대 총회장 피선


192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2회 총회가 신의주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총회에는 19개 노회의 목사 74명, 장로 74명, 선교사 31명이 참석하였다. 충북에서는 함태영 목사와 경환 장로가 총대로 참석하였다. 제12회 총회에서 함태영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고 총회장에 피선 되었으니, 이런 예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는 연동교회 장로로 청렴 결백하고 강직하며, 인자한 성품과 공정함으로 교회 지도자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민족지도자라는 점도 높이 평가 받고 있었다. 이러한 그에 대한 평가는 목사 안수와 동시에 총회장에 피선되는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청주읍교회도 함태영 목사의 총회장 피선은 큰 자랑이었다. 234)
그는 총회장 재임 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조직하여 각 교단 및 기관 단체의 협력을 꾀하였다. 이는 1918년 조직된 ‘조선예수교장·감연합회’를 발전시킨 한국 교회 협의체이다. 그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 협력, 사업의 연합 등을 추진하던 협의회에 다른 여러 기독교 단체와 외국 선교부도 포함시켜 명실 상부한 한국 교회 협의 기구를 조직하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미남감리회, 미감리회, 조선선교회 장로파 4단체, 영국성서공회,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주일학교연합회 등의 기독교 기관들이 참여하였다. 이는 장로교, 감리교 양 교파 간의 단순한 협력 차원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과 교회의 단일한 입장 정리 등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예수교공의회’는 농촌 사업, 절제 운동, 주일학교 운동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235)

제목
교회 전체 연혁
2003 김병완, 이승렬 장로로 임직, 김관화,김홍식,나채운,윤수영,이박희,조대선,차용출,최광석,황승일, 김숙자,남경우,박명옥,박순동,송형헌,양유자,오명희,유수복,유연희, 유용선,이광분,임명순,정순모,정영희,한길수(24분) 권사 취임하다.(4.26)
2003년도 이쾌재 목사 명예·공로목사로 추대,이건희 목사 담임목사로 취임하다(4.26)
2002년 청주제일교회 제규정집 제정하다(2월) 이윤희 장로 은퇴하다(12.29)
2001년 민노아관 준공식을 하다.(12월 16일) file
1979년 서도섭목사사임, 유병찬목사(14대) 취임, 장학위원회를 조직, 목사관 및 제일상가를신축하다. file
1978년 김창구권사 취임하다.
1977년 최동준 이영배 이윤희장로 장립, 김상기(남),권용희,김갑인,김복문,백경애,이삼례,이정림,장복덕,조윤순 권사 취임하다 file
1976년 청신고등공민학교 이수(세광학원에서 인수운영)하다. 최초 여신도회 분리조직
1975년 제1회 성곡의 밤을 개최하다.
1974년 교회창립 70주년 기념행사( (70년 약사 발간) , 김치덕 김송학 김갑영장로 장립 하다 file
1970년 서도섭목사(13대) 취임하다. file
1969년 강신정목사 사임하다.
1968년 이태희 엄평우장로 장립 file
1966년 안봉걸 목사 소천하다. 강신정 목사(12대) 취임하다. file
1964년 조선출 목사 사임, 안봉걸목사(11대) 취임, 교회창립 60주년 기념행사, 청주제일교회가 제정 file
1963년 노준성 이명수 한기창장로 장립하다. file
1962년 최인호, 김영훈장로 장립하다 file
1961년 구연직목사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 조선출목사(10대) 취임하다. file
1960년 세광고교 대성동으로 이전하다. file
1958년 박기순,박윤이,오성애,이삼례,장복덕, 조윤순 안수집사에 취임하다.
1957년 구연직목사 총회장(제 4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56년 최초의 표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제정, 남산교회를 개척,박종헌장로 장립하다.제5회 기청 전국교육대회 유치
195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다. 박찬석장로 장립하다.
1953년 세광고등학교를 설립. 교회희년 축하예배. 청신고등공민학교 인수하여 운영하다.
1952년 북문교회를 개척하다. 김현태장로 장립하다.
1951년 교회 증축공사를 완공하다. 주보 창간호를 발간(10월 7일 제 1호)하다. file
1950년 학생회 '성종' 창간호를 발간하다.
1949년 교회증축공사를 착공하다. 세광중학교를 설립하다.(9.15)
1948년 이창수, 홍청흠장로 장립 하다.
1947년 학생성가대 조직(메시야성가대)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 구연직목사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 반공투쟁 주도하다.
1946년 충북노회를 조직되다. 초대 노회장으로 구연직목사 피선되다.
1945년 Y.M.C.A를 설립 하다. 소년,소녀 면려회를 조직하다. file
1942년 선교사들 철수하다.
1941년 충청성경학원를 설립하다
1940년 현 예배당를 완공되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file
1939년 현 예배당를 착공하다. file
1938년 구연직(9대) 취임하다. 송재경, 안희상장로 장립하다.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1934년 창립30주년 기념행사, 제2교회(현중앙교회)분립하다. file
1932년 경환목사 사임,김영로목사(7대) 취임,부속건물 신축(목사관,전도실,유치원)를 하다
1931년 이상필장로 장립하다.
1929년 상당유치원를 개원하다. file
1928년 함태영목사 사임.경환목사(6대) 취임.하기 아동성경학교를 개최하다. file
1924년 서상필 장로 장립(10.1)
1923년 망선루를 본 교회내로 옮기다.함태영목사 총회장(제 1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22년 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file
1921년 최영택목사 사임,황청교회 개척를(현 상야교회)하다.
1920년 외덕교회를 분립(현 우암교회),김태희, 최원진 장로 장립,예배실 남녀 좌석 구분 휘장를 철거하다.
1919년 3.1만세 운동 전개를 시도하다 실패하다.남자 전도회를 조직하다 file
1918년 황준국목사 사임,최영택목사(4대) 취임.김정현, 김중원 장로 장립,청년전도부를 조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