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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설립 - 청주읍교회(淸州邑敎會)

 

1900년 말부터 북장로회의 민노아 목사는 장로교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충청도(忠淸道)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보조자 김흥경(金興京)조사와 함께 청주지역을 돌며 전도하여 김원배(金源培), 방흥근(方興根), 이영균(李英均), 김재호(金在皓), 이범준(李範俊) 등과 같은 유망한 청년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 중심으로 1904년 남문밖에 여섯 개의 방을 가진 커다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김흥경의 처소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전도한 이들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열었다.

 

교회가 정치․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층에게 새로운 가치와 활동의 공간을 제공하였으므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교회에 나왔고, 사회의 변화와 구국을 갈망하던 젊은 청년들도 열심히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교회 설립 1년 만에 교인이 50여명을 넘을 정도로 부흥하였다.

 

교인의 증가로 이 초가집으로는 더 감당할 수가 없어 1905년에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지를 매입할 만한 자금이 문제였다. 마침 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인 김원배가 임종 유언으로 교회에 기부금 100원을 헌납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온 교인들이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새로운 교회부지를 매입하고, 거기에 교회를 크게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곳이 현재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남문로 1 가 154번지 일대의 지역이다.

 

이곳은 본래 청주 영장(營將)의 관사와 죄인들을 가두는 옥사가 있었던 장소로 조선 후기 천주교 대 박해 때에 많은 교인들이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순교의 피눈물을 흘리던 역사적인 곳이다. 그러므로 청주읍교회는 개신교회로서,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이 고문당하고 순교 당한 바로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데에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당시 동학운동(1894~95) 때 관군 편을 들어 공을 세운 보부상 조합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그 땅을 사들인 것이다. 1천 5백 평되는 넓은 대지를 확보한 교회는 1백 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방흥근의 집에서 모이던 청남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여학교인 청신학교(淸學校)도 설립하였다. 후에 소민병원(蘇民病院)으로 발전하는 시약소(施藥所)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당유치원과 청주남녀 성경학원도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이곳 청주읍교회에는 구국의 정열을 가진 애국청년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또한 이 교회 출신들이 일제시대 민족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일제치하의 탄압가운데에서 구국 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나마 모일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청주읍교회는 전도․교육․사회운동, 그리고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청주읍교회(淸州邑敎會)는 1909년 평양 남문 밖 교회에서 이사온 장로 박정찬(朴禎燦)을 장로로 위임하여 당회를 조직하므로 충북 최초의 자립교회가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민노아 선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