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1904년  청남학교를 설립(현 청남초등학교) 하다.

11]청남학교 개교 30주년기념-1 1935.3.19.jpg

 

 


청남학교(淸南學校)와 민족교육(民族敎育)

 

 

  청남학교는 개화사상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학문을 지향하는 민족 기운이 팽배하던 때, 1904년 11월 1일, 방원근(方源根), 김태희(金泰熙), 김원배(金元培) 등 젊은 우국 청년들에 의하여 광남학교(廣南學校)로 출발하였다. 교육구국의 이념아래 널리 인재를 구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처음 방흥근의 사저가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대표격인 학교장은 김태희(金泰熙)가 맡아 학교를 운영하여 나갔다. 이 학교는 개화사상에 의해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근대 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처음 설립당시 15명의 학생으로 출발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던 시기였기에, 그간 서당에서 유교 경전 중심으로 공부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새 학문과 개화사상을 지향하는 근대적인 학교로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개설 초창기 학교 운영이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교육구국의 일념을 가지고 방흥근의 재정적 후원 하에 선뜻 학교를 개설하기는 하였으나, 학교 운영 면에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그 때에 청주읍교회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펴고 있던 민노아(閔老雅)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는 교회 청년들이 건전한 뜻을 가지고 운영하는 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우며 협력하여 주었다.

  그 후 1908년, 이 학교는 청주선교부 명의로 구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정식으로 사립학교 허가를 얻어 학교명을 청남학교(淸南學校)로 개명하고 청주읍교회에서 인수하였다. 설립자 겸 교장으로 민노아 선교사가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청남학교는 미국 북장로회에 소속되어 청주읍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청남학교는 1921년에 학제가 바뀌어 4년제에서 6년제가 되고 고등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여자 학교인 청신여학교(淸信女學校)3)를 합병하여 남녀 공학의 학교가 되었다. 1924년부터는 이전된 망선루(望仙樓)를 교사(校舍)로 사용하여 교육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런데 학교운영에 있어서, 민노아, 계군, 소열도 등 선교사들이 교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이것은 형식상이었고 실제로는 한국인 교사가 교감직을 맡아 실제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감직은 일제기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처음에는 김태희, 그 다음에는 최창남(崔昶南)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애국정신이 투철한 교사들과 함께 폭넓은 민족교육을 심화하여 갔다. 

  1930년대 중엽,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을 때, 청남학교는 이것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일본이 1935년에 들어와 대륙 침략 정책상 강력한 황민동화(皇民同化) 정책을 내세워 민족문화말살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기독교 학교에까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자, 청남학교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수하여 나가려 애썼다.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이 강한 청남학교는 1936년,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에 거교적으로 반대하여, 1936년 10월 2일, 당국으로부터 휴교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이 때에 신사참배에 불응한 정규태(鄭奎泰)․정순경(鄭順敬) 선생은 옥고를 치르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으며 박종열(朴鍾烈), 강병찬(姜炳瓚), 박복만(朴福萬) 이종호(李鍾好) 등 주동학생은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여러 가지 갈등가운데에 결국 당국에 순응하고 8일만에 다시 개교하였지만, 종전의 학교 교사와  선교사들이 학교를 떠나 주인 없는 학교가 되자, 동년 12월 4일 과거 교육경력을 가지고 있던 崔東善이 인수하여 청주제일교회로부터 1938년 상당구 영운동 오늘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 후 일제는 大成學校와 淸南學校를 합병하여 成南國民學校로 개명하고 공립학교로 삼았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은 후, 9월 24일에 청남이라는 옛 이름을 다시 되찾아 청남국민학교가 되었다가 오늘의 청남초등학교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청남학교는 일제로 인한 수난 가운데에서, 기독교 정신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교육내용과 방법을 택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면서 많은 종교, 사회적 지도자들을 배출 시켰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교회, 선교사, 시민들의 후원과 협조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무엇보다 학생을 가르치는 젊은 애국 청년들과 우국지사들이 청남학교 교사로 부임하였고, 특히 학감으로서 실제상의 교육의 책임을 맡고 있던 김태희와 최창남은 청남학교의 민족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1)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을 보면, 개화사상에 근거한 새로운 근대 지식과 사회에 적용력있는 실제적 과목을 교수하였다. 聖經 외에 修身, 朝鮮語, 日本語, 漢文, 算術, 歷史, 地理, 理科, 圖畵, 唱歌, 體操, 家事 등 인문․사회․자연과학 등을 교육하였다. 한학중심의 재래식 교육에서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여 계몽과 근대의식과 민족 자주의식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물론 교육내용에 있어서 서구학문의 기초과정이 주가 되어 있었지만, 서구적인 인격형성보다는 국권회복을 위한 양식 있는 한국인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의 내용이나 지도에 있어서 민족의식을 강하게 교육하여 독립정신을 일깨워주었다.

  

2) 淸南學校職員名單

校長: 蘇悅道 선교사(청주 활동 1918-1937), 校監: 金泰熙(청주제일교회 장로), 學監: 咸台永(3.1운동, 청주제일교회 5대목사 1922-1928, 총회장 1923, 부통령), 舍監: 朴濟萬장로(會計), 郭基鉉(延專,서상필 장로 사위), 委員: 李東鉉(이영태 씨 부친), 宋相憲(송인호씨 조부), 李秉俊(제일교회 장로), 朴喆圭(女,梨花女專), 千瑪利亞(김현태 장로 모친),  敎師: 方允根(국어, 수학 담당), 金鳳鶴(성악가 테너), 朴魯璟,(朴完圭 씨, 前 甘草堂 韓醫院 院長, 『落穗』1995. 의 부친), 崔昶楠(국어), 金就道,  請負監督: 金洸鉉, 都便手: 鄭相弼, 韓翼東, 金玟聲, 申仲均, 林澔然(덕촌교회 장로 6,25 때 순교), 吳致根

   - 全淳東, 望仙樓 上樑文에 대한 一考, 中原文化論叢, 2000, P 175. 

4) 최창남(崔昶南)은 구한말, 일제 식민기,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 시기 등 3시기를 걸쳐 살면서 교육과 어린이와 한글을 끌어안고 살다가 생을 마친 교육자로서, 충북지역 최초의 아동문학가이고 한글운동가이다. 그는 청남학교 교사로서, 청남학교와 운명을 같이 하면서 일제기 어려운 시기에 한결같이 학교를 민족 교육의 장으로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또한 동요 동시 창작활동, 어린이 운동, 한글운동 등 문화적인 측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여름에는 한글학자 최현배를 초청하여 일주일동안 한글강습회를 개최하여 한글의 원리와 새 철자법의 문법적 기초를 보급함은 물론 우리의 말과 글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정신적 기조를 다지기도 하였다.

    - 전순동․최동준,「일제기 청주지방의 민족교육운동-청남학교를 중심으로-」pp.12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