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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만세 운동 전개를 시도하다 실패하다.남자 전도회를 조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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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도회 조직과 활동


청주읍교회 남전도회의 기록은 1919년 처음으로 나타난다.

“1919년(기미) 청주읍교회에서 남자전도회를 조직하고, 청주군 문의와 쌍수 등지에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다

1919년 청주읍교회 남전도회는 청주군 문의와 쌍수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의 혼란 속에서도 충북연합전도회를 조직하여 안기수(安基秀), 유병찬(劉秉燦)을 청산·보은 등지에 안기환(安琦煥), 이병식(李秉植)을 청주 탑리 등지에 파송하여 전도하게 하여 이를 바탕으로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의 많은 사업에서 남전도회 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전도회가 더욱 활동적인 것이 교회의 특징이다. 여러 제약 요인 중에도 청주읍교회 남전도회는 서로 협력하여 교회 활동에 참여하여 봉사하였고 특히 주변 농촌 지역의 복음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0년 남전도회가 농촌 교회를 순회 전도 하였고 1921년 노년전도회에서는 문의, 외내, 노계 등 세 곳에 주일마다 전도인을 파송하여 개척한 결과 수십 명씩 되는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 청주읍교회 부인전도회에서는 전도인을 세워 부강에 파송하여 부강교회를 세웠고, 충북전도회에서 전도인을 파송하여 탑리 교회를 세웠다.


1922년 청주읍교회 남녀 노년전도회에서 전도인을 파송한 사례가 보인다.

“청주읍교회 노년 남녀회에서 각각 전도인 1인씩을 세웠으며 별도 전도인 4인을 세웠으며 작년 7월에 청주읍교회 청년회에서 4인씩 2대로 나누어 도내 17처에 순회 전도하였으며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문화재 건물인 망선루가 일본 지배 하에서 망실될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1922년에 청주읍교회 청년회에서는 이를 살리기 위해  100여원을 헌금하였다.

 

 

청주 지역 3·1운동에 앞장선 청주읍교회

 

1) 청주지역의 3.1운동


충절의 고장 충북은 옛날부터 우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3.1운동 때에도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6인을 배출한 곳이다. 청주 우암산 서쪽자락을 돌면 ‘3·1공원’이 있는데, 이것은 민족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민족 자긍심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1980년에 조성한 공원이다. 거기에는 충북 출신 독립 운동 지도자 6인,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 정춘수 등 6인의 동상이 있다. 그 중 신홍식, 신석구, 정춘수 등 3인은 목사 출신으로, 3·1운동 시기에 충북 출신 기독교인이 활약한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청주 지역에서도 젊은 기독청년들이 민족 운동에 참가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청주읍교회 출신으로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 학생이 밤에 교회를 찾아와 서울의 만세시위 운동의 소식을 전하였다. 민족의식이 강한 최영택 목사, 청년회장이며 청남학교 교감인 김태희, 청남학교 교사 및 교회 청년들은 일찍이 이 소식을 듣고 청주에서도 장날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교회 조직을 통해 확대해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427) 그 후 3월 9일, 청주 공립 농림학교 학생 70여 명이 청남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것도 사전에 이를 눈치 챈 일제 관헌의 감시와 단속으로 인하여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충주 달천리 만세시위운동(3. 11), 옥천 만세시위운동(3. 16), 괴산 독립만세운동(3. 19)429)등이 연이어 일어나자 청주읍내에는 기마헌병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청주의 만세운동은 청주 주변 농촌에서부터 전개되기 시작했다. 3월 23일 강내면, 강외면, 옥산면에서 봉화시위가 먼저 벌어졌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밤에는 봉화시위를 벌이고 낮에는 읍내로 몰려와 만세운동을 벌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오창, 부강 등지까지 확산되었다.
이처럼 3.1운동 이후, 크고 작은 시위운동이 청주 일원에서 전개되는 가운데 청주읍내에서도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특히 3월 23일에는 낮에서 밤까지 운동은 계속되었고 청주에 모인 사람들만 해도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청주시내 학교 중에는 특히 청주농림학교가 항일 시위운동에 적극적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로 인하여 청주 공립농업학교는 임시 휴교조처를 당하였고, 주동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언도를 받고 끝내 퇴학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3월 30일에는 미원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청주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오교선, 박우동, 민원식 등이 주동이 되어 벌어진 미원면의 만세시위는 장날을 틈타 모여든 1,000여 명 이상의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경과 격렬히 충돌하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북일면 세교(細橋)에서도 의병장 한봉수의 지휘 하에 미원면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2) 청주읍교회는 독립운동의 중심적 위치에 서서 활동하고


청주 만세 시위운동 당시, 민족운동가와 의식 있는 선각자들, 이른바 김태희, 정규택, 민대식, 김종원, 김영식 김정현 등 교회 및 시내 청년들은 교회에 모여 만세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모의하였다. 이들은 만세 운동시에 사용할 격문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청주 3.1운동의 주동자이고 청주읍교회 청년회장인 김태희는 교회 청년, 시내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청남학교 교사 및 학생들 그리고  청주읍교회 교인들은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교회 남녀 청년들은 연락책임을 맡고, 동원의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3.1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의 간섭과 제재가 심하였는데, 김태희, 박경학, 이동현, 정규택, 김태근, 김광현 등이 청주 경찰서 유치장에서 근 1개월간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청주읍교회는 시민 대중들과 함께 청주지역 3.1운동을 모의하고 추진하여 가는 과정에서 교회가 민중운동의 중심적 위치에 굳게 서게 되었고, 또한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교회는 민족의 운명과 동일한 행로를 간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보여준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애국 애족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내적으로는 교회 남녀 청년들의 활동이 부각되어 이후 청년운동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 당시 교회의 신도 수는 더 늘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1919년 12월 연말에 민노아 선교사가 보고한 충청도 시찰위원의 보고에

감사 할 일 : 금년 봄 독립만세 사건으로 각 교회가 뒤숭숭하나 아무 환난 없이 지낸 것과 각 교우의 신앙이 점차 견고하여지는 일.
교회 형편:신자가 증가되며, 은연중 핍박은 좀 있으나 과하지 않으며, 개인전도에 힘쓰고, 건축은 청안읍교회와 괴산 칠성암교회당을 건축한 일과 사경회는 겨울에 시작할 계획이며...

 

 3.1운동으로 여러 교회가 뒤숭숭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시련을 통해 교인들의 신앙이 더욱 든든해지고 신자도 늘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교회도 건축되었다고 보고 있다. 3·1운동으로 인해 교회가 일경에게 핍박을 받긴 했으나,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라는 찬송을 힘차게 부르며 개인전도에 힘쓰는 가운데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지역의 만세 시위가 일경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청주지역 3.1운동의 중심인물인 청주읍교회 김태희는 김정현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연통제 하의 충청북도 참사로 임명을 받고434) 상해임시정부와 연결하여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들은 독립자금을 조달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김태희는 어려운 생활형편에서 양봉 등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밀송하였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담임 목사로 있던 최영택 목사는 1922년에 일제에 의하여 ‘사상범’, 이른바 ‘항일 민족운동가’로 낙인이 찍혀 무고하게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최영택 목사가 일제에 의하여 사상범으로 몰려 많은 고초를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경충노회에 참가한 노회 총대들은 그 즉석에서 모금을 벌였다. 최영택 목사 영치금으로 소요 예상 금액은 약 70원이었는데, 즉석에서 65원이 모금되었다. 60원은 최 목사에게 그리고 5원은 입원 치료 중에 있던 김상현 장로의 위로금으로 보내기로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