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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304 1917년 소민병원를 건축하다.

2012.01.17 10:20

조회 수:393

소민병원.jpg 1917년 소민병원를 건축하다.

 

 청주 선교부 민노아 목사는 인근에 병원이 없던 청주 지역에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을 세워 농촌을 계몽하고, 선교하는 것이 시급함을 본국에 편지를 보내어 호소했다. 청주 선교부의 이와 같은 절박성을 전해 듣고, 미국 뉴욕에 사는 던컨(John P. Duncan) 부인이 1908년 병원 건축을 위해 선뜻 5천 달러 헌금을 약속하여 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청주 선교부에서는 그 돈을 가지고 1910년 4월부터 병원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이에 관한 기사가『미국 장로교 한국 선교사』에 다음과 같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알려 왔다. 1910년 4월에 기초는 놓여졌지만, 병원은 아직 마련되지 않아 1912년 7월 29일까지는 환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던컨 부인은 비품, 우물, 급수 설비, 수위실 마련 등을 위해서 관대하게도 2000달러를 더 추가하여 지원하여 주었다. 새 건물의 진료부는 1911년 1월에 입주했다. 그리고 민노아 목사 부부 앞으로 된 두 채의 한옥이 입원환자를 위한 병동으로 사용되었다. 그 해 7개월 동안에 총 진료회수는 총 2500회였다. 의료사업을 위해 참여한 한국인 직원은 전도자 한 사람, 전도부인 한 사람,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양성소 출신의 간호사 한 사람을 포함하여 7명이었다.

이것을 보면, 이 병원은 전적으로 뉴욕에 살던 던컨 부인의 기부금이 큰 몫을 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4월에 시작한 건축공사는 1912년 7월에 준공되었다. 자금 부족으로 전체 공사가 완성되기 전이었지만 진료실로 사용할 공간이 확보되자, 1911년 1월에 우선 입주하여 약국을 열고 활용했다. 그 때에 던컨 부인이 내부 의료 시설, 우물, 급수 시설, 그리고 수위실 등 부대 시설을 위해 2천 달러를 추가로 보내주어 시설 설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1912년에 가서 완전한 병원으로 기능을 수행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조선식 기와 지붕에, 반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이 완

성되어, 진료실과 수술실 등 면모를 갖춘 근대적 병원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선교사들 사이에는 “던컨 기념 병원(Duncan Memorial Hospital)”으로, 청주 사람들에게는 “소민병원(蘇民醫院)”으로 알려진 청주 최초의 서양 병원이다. 청주소민의원은 일신학원 내에 있는 양관 중 제일 서편에 있는 건물로,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13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학교의 양호실, 상담실, 선교실, 도서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창기의 기독교 건물이 그러했듯이 이 건물도 한․양 절충식으로 지어졌다.3)지붕은 맞배형의 구조에 한식 기와를 얹었다. 기초부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적갈색 벽돌로 되어 있다. 창문은 올리고 내리는 장방형 창에 회색 벽돌로 결원형 아치 쌓기의 인방을 하고 있으며, 바닥은 80mm 폭의 쪽마루를 깔았다.

병원 건물은 남향이며, 동서로 길게 배치한 장방형이다. 이 점은 다른 양관의 건물이 주로 서향을 주향으로 하여 남북 배치를 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이것은 병원 건물임으로 남쪽 채광을 최대한 고려하여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기와로 덮어 볼 수 없으나 본래 지붕에는 자연 채광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지붕 창까지 내었다고 하니,이 건물이 다른 양관처럼 주택용 건물이 아니고, 병원건물이었기에 채광에 대하여 특별히 배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은 주 현관을 동쪽과 북쪽, 두 군데에 설치하여 병원에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고려되었다. 동쪽의 것은 환자들이 드나드는 현관으로, 북쪽의

것은 의사와 직원들이 사용하는 현관으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현재는 건물 내부를 개조하여 교실, 양호실 및 여러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으나 처음에는 약국, 진찰실, 응급실, 수술실 등으로 사용하던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다. 동쪽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곳에 투약구가 있었으며, 1층에 응급실 수술실 및 진찰실을 마련하고, 2층에 회복실 및 여러 사무실을 두었다. 그리고 화장실은 건립 당시부터 정화조를 설치하여 건립 당시부터 수세식으로 했던 것이다. 난방은 지하에는 보일러실을 두고 스팀을 이용했으며, 지하에 공기난로를 설치하고 함석을 둘러싸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도록 하는 장치를 설비했다.

 

선교사들은 소민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선교의 좋은 대상으로 삼았다. “누구나 병원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전도용 소책자나 복음서를 받든지 아니면 복음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선교부에서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를 놓치지 않고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병원을 통하여 사람들은 복음을 빠르게 이해하게 되었기에 부반서 의사는 “병원에서의 전도사업은 매우 고무적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실로 의료사업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의료 선교는 소민병원의 고정된 공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틈틈이 시골 지방을 순회하여 농촌의 환자를 치료하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부반서는 1912년의 경우, 농촌을 돌면서 4,000건의 진료를 하며 선교를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3) 일제 치하의 농촌에는 고된 노동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으로 많은 환자가 속출하는 농촌을 찾아다니면서 의료와 선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것이다. 

그런데 1913년부터 1917년까지는 의료 선교의 시련기가 되었다. 1913년에 간호사 호우 양이 청주를 떠나고, 뒤이어 부반서 의사가 또 청주를 떠났기 때문이다. 호우 간호사가 5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1913년 돌연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녀는 한 환자를 일본까지 데리고 가 치료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한 후 곧 귀국했다. 거기에 더욱 소민병원을 지으면서 초창기 의료 선교의 기반을 다져온 부반서 부부가 돌연 미국으로 귀국하고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병원 수련의로 있던 한국 의사가 의료 사고를 냈는데, 이 일로 시련을 겪다가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귀국한 것이다. 이들 외국인 선교사와 간호사의 귀국은 청주 선교부의 의료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거기에 일제는 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의료사업을 견제하고 있어 더욱 어려움을 안게 되었다.

그 후 1914년 12월, 팁톤(池敦, P. S. Tipton) 부부가 청주 선교부에 부임하여 의료 선교를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인정하는 의사 자격을 가지

고 있지 않아 의료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때 일제 당국에서는 엄격하게 의료활동을 규제하여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면허를 취득하지 않으면 의료활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의 의료 선교의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려 하였다. 미국에는 500-600명 중에 의사 1인이 있고 뉴욕의 한 블록에는 72명의 의사가 있지만 인구 3만을 가지고 있는 충북에는 2개의 병원에 병상 침대가 20개 밖에 없는 곳이라면서 한국에서의 의료활동을 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그리하여 팁톤은 일본 정부가 발급한 의사 면허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두 번이나 일본 동경에 가서 면허시험에 응했으나 낙방하는 비운을 겪었다. 한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면허시험 대비에 소홀한 탓이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시험에 응시하여 1916년 1월 마침내 면허 자격을 획득하고 병원의 문을 다시 열었다.

5) 청주읍교회 구내에 소민병원 진료소 설치

팁톤 의사가 의료 선교사로 있을 당시, 1917년은 청주 선교부의 의료 선교사상 획을 긋는 해가 되었다. 그것은 남문로 1가 156~1, 2번지 도심지에 ‘소민병원 진료소’를 개원하여 환자들의 편익을 크게 증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신학원 자리에 위치한 소민병원은 청주 선교부 바로 곁에 있어 관리하기는 편리했지만, 병원이 가파른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환자들이 오르내리기에는 힘들다는 입지적 제약을 안고 있어, 시내 가까운 곳에 병원이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1917년 12월, 1,500달러를 들여 청주제일교회 구내에 “소민병원 진료소”를 다시 신축하여 개원했다. 이후 양관의 소민병원은 입원실로 주로 사용되었다.

소민병원 진료소가 도심지에 세워짐으로 많은 환자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1918년 6월 선교부의 보고에 의하면 ‘그 해에 4천 명의 환자가 이곳을 다녀갔다.’ 고 한다.

비록 소민병원이 해방 후 다시 개원되지는 못하였지만 일제 강점기 여러 취약성을 극복하면서 청주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제일교회의 구내의 소민병원 진료소를 중심으로 의료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소민병원이 이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1)

① 청주 선교부를 통한 의료 선교는 충북 최초의 의료 활동이었다.

② 의료 선교는 외국인과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주민들의 편견을 해소하고 기독교 복음에 접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③ 전통적 양반 사회의 기질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충청도의 사람들에게 서양의 근대 의식을 심어주고 유교적 가치관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④ 충북의 많은 사람들이 소민병원을 통하여 의료혜택을 크게 받았다.

⑤ 의사나 간호사는 각계각층의 사람을 두루 접하고, 특히 몽매한 농촌 사람들과 접하면서 보건 위생에 관한 인식을 진작시키고, 더불어 농민들의 편견․악습․미신․불합리한 생활습관 등을 제거하는 등 근대 의식을 고양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활태도가 농촌에 많이 보급되었다.

⑥ 병원은 자체가 하나의 선교 기관이었다. 의료 활동은 선교의 방편이었기에 병원은 그 자체로 전도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병원과 진료소는 선교 초기에 기독교와 외국인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하여 선교의 문을 여는 수단이 되었음은 물론, 영적인 가르침이 육체의 치유와 함께 병행되어 청주읍교회 발전과 충북 기독교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⑦ 소민병원은 지방 의학계의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여러 의사들이 소민병원에서 수련과 경험을 쌓아 장차 독자적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 영향으로 충북의 엘리트들이 의사가 되는 계기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