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1920년 외덕교회를 분립(현 우암교회),김태희, 최원진 장로 장립,예배실 남녀 좌석 구분 휘장를 철거하다

 

- 외덕교회(현 우암교회) :

청주읍교회 신자인 나정일에 의해 청주군 사주면(四州面)에 청주읍교회 기도처로 시작하여 1920년에 외덕교회(外德敎會 現 牛岩敎會) 가 설립되었다. 청주읍교회 신자 나정일(羅正日)이 간혹 청주읍교회에 출석할 수 없는 경우에는 수요기도회를 자기 집에서 드리며 인근 동네에 열심히 전도함으로 신자가 점점 늘어났다. 그 후 청주읍교회에서 분립하여 자기 집을 증축하여 예배당으로 제공하였다. 이후 나정일 씨는 공공사업에 헌신하면서 1924년 봄에 예배당 건축에 100여원을 기부하였다. 그 후 청주 망선루 이전 사업에도 거액의 기부금을 헌납하였으며 또 동지 전종갑씨와 합력하여 7월 27일부터 그 동리에 야학을 설립하여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모와 가르침으로써 나정일씨에 대한 칭송이 주변에 자자하였다

 

김태희(金泰熙, 1877∼1937, 一石) 장로는 190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 청주 지역의 기독교 민족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며 사회 사업, 교육 사업, 문화 사업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77년 청주시 탑동에서 출생한 김태희는 일찍부터 신학문을 접하고 근대 문명에 눈을 뜬 지식인이었다. 그는 한말 위기에 빠진 조선 사회를 구하는 길은 교육 사업으로 생각하고 1904년 방흥근, 김원배 등과 함께 사립 광남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 민노아 선교사와 협력하여 광남학교를 청남학교로 개칭하였다. 또한 청신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성 근대 교육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한·일합방 이후에도 교육 구국에 대한 김태희의 열의는 지속되었다.

1921년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인 망선루가 철거될 위기에 빠지자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청주읍교회 구내로 이건하여 청남학교의 교사로 사용하였다. 1923년 일제의 우민화 교육 정책에 대항하여 전국적으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벌어지자 청주 지역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청주 지역의 근대 민족 교육 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김태희는 일제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구국 투쟁에도 앞장 선 민족운동가였다. 1909년 신백우, 신팔균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281)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고 청주읍교회 청년들을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3·1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도 담당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조직인 연통제의 충북 참사(책임자)가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 일제 치하 최대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청주지회장으로 선임되어 1931년까지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한 민족 운동을 펼치던 김태희 장로는 민노아 선교사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민노아 선교사와 알력을 빚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두 사람의 신앙관 차이가 근본 원인으로 보인다.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들의 집단적 성격에 관한 최근의 연구282)에서도 일부 밝혀지고 있지만 청주선교부의 선교사들도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보다 보수적인 입장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청주선교부를 대표하는 민노아 선교사와 교회를 통해 조국과 민족의 구원을 이루려는 김태희 장로의 마찰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청주선교부와의 갈등은 청주읍교회 내부에서 김태희 장로의 역할과 위상을 제약하였고 결국 그는 청주읍교회를 떠났다.

1930년 즈음 신탄진으로 이주한 그는 신탄진에 야학을 개설하고 청년 운동을 전개했다. 1936년 홍수에는 금강 범람으로 위기에 처한 부락민들을 구하고 수재민 구호에도 앞장섰다. 1937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최원진 장로(崔元珍, 1862. 2. 11∼1937. 7. 7)는 1862년 2월 11일 평양 선교리(船橋里)에서 중국과 교역을 하는 부친 최경화(崔京化)와 모친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중국과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최경화는 신실한 동학교도였다. 동학혁명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사업이 부진하고 가세마저 기울던 중 평양에서 한 선교사를 만나 아들 최원진과 함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청일전쟁(1894년∼95년), 러일전쟁(1904년∼05년)의 참화를 경험한 40대 후반의 최원진은 1909년 평양을 떠나 청주에 안착하였다. 당시의 청주는 시국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된 지역이었다. 또한, 청주는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다.283)

청주에 도착한 그는 남문로 1가 약전 골목에 정신정미소(正信精米所)를 시작하였다. 정신정미소는 디딜방아가 고작이었던 당시에 근대적 설비를 도입하였다. 또한, 청주 유일의 한국인 정미소였기에 주민들은 이곳을 많이 찾았다. 정신(正信)이라는 상호가 보여주듯 신용있는 방앗간으로 소문 나 일본사람들도 이곳 정미소를 찾았다. 이 정미소는 평양 쌀집으로 불리었다.

부유한 최원진 집사는 청남학교를 후원하는 일, 어려운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신실한 생활로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민족주의적 성향의 김태희 장로와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최원진 장로285)는 1920년 청주읍교회 장로로 취임하였다.

 

예배당 안의 휘장 철폐

초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교회 예배당 안에는 남녀가 각각 따로 앉게 좌석이 구분되어 있었다. 하얀 천으로 된 휘장이 출입문에서 강대상 앞까지 쳐 있었고, 어떤 교회는 ㄱ'자 교회 건물을 세워 남녀석을 구분하였다. 이것은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시절, 남녀를 구분하여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으로,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유교적인 전통과 남녀평등이라는 새로운 서양문화가 은연중에 조화되어 나타난 광경이었던 것이다.

이런 광경은 한국 교회가 얼마나 유교적 바탕위에서 출발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무리 가운데에 휘장을 쳐 가로막았다고는 해도, 한 방에서 남녀가 함께 앉아 예배드리고, 또한 서양 선교사나 목사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의 문화와 사회 여건 속에서 볼 때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 교회가 그러했듯이, 청주제일교회도 초창기부터 예배당 안에는 강단에서부터 뒷좌석까지 길게 휘장을 쳐 남녀 좌석을 구분하였다. 강단을 향하여 오른쪽은 여자석, 왼쪽은 남자석으로 하고 그 가운데에 광목으로 휘장을 만들어 자리를 구분하여 엄숙하게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남녀가 유별한 유교적 통념과 남녀평등이라는 새로운 서양 문화가 교회 내에 은연중에 조화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녀평등의 사상이 고양되어 가고, 여성들의 활동이 점점 두드러지면서 휘장 문제가 대두한 것이다. 휘장을 치고 걷는 일은 이미 1913년 제2회 총회에서 모여 예배하는 데 무례할까 조심하기 위한 일이므로 예배당 안에서 휘장을 치고 걷는 일은 그 당회에서 형편대로 조심하여 처리할 것이라고 결의함으로써 자율적 사항에 속하여 있었다.

하지만 양반 고을에 있는 청주읍교회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선뜻 개선하지 못하고 여전히 남녀가 한 방에서 예배드림으로서 나타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휘장을 쳐서 남녀석을 가로 막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에 드디어 청주제일교회에서는 예배당 안의 휘장을 걷어 내었다.

이것은 특히 3.1운동 이후 남녀유별이라는 개념보다도 남녀평등이라는 개념을 우선하는 사회적 풍조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보다도 교회 내의 여성들의 위상이 높아지고 교인들의 의식이 그만큼 고양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간 1913년부터 부인전도회가 조직되어 교회의 안팎으로 전도와 봉사에 힘쓰면서 여성의 위상이 높아졌고, 청남학교, 청신여학교의 교육발전으로 그만큼 여성관 및 남녀평등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교인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던 데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교회 주일학교 교사, 청년회, 부인전도회에서는 예배당 안의 휘장 철거를 주장하여 왔고, 그 결과 1920에 이르러 남녀를 구분하는 교회 내의 휘장이 걷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휘장의 철거는 단순히 교회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상승되었다는 교회 내적 사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청주지역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서서히 여성의 권리도 인정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여자도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지역 여성사 변혁의 입장에서 뿐 아니라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