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9304 1922년 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2012.01.17 10:27
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1) 제5대 함태영 목사 부임
1923년 함태영 목사는 청주읍교회 제5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신학생으로
남대문교회 조사로 활동하던 그는 목사로 부임하기전 이미 청주읍교회에서 1922년 6월 이전부터 조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감사할 일 : 각 교회가 주 은혜 중 평안히 지내오는 중 교유들이 신령한 재미를 얻어 믿음이 굳게 되오며 새로 열심과 전도의 새 소망이 많사오며 청주읍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 함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으며 함태영 장로를 청빙하여 조사로 사역하게 된 일과 새로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많이 증가되오며...”1)
그는 1922년 평양의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23년 1월 7일에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청주읍교회에서 목사 1인 청원 : 청주읍교회에서 신학 졸업생 함태영씨를 위임 목사로 청빙할 일과 피택 장로 이호재씨와 괴산읍교회에서 피택장로 김주현씨를 장립하였사오며 보은읍교회와 원평리교회에서 각각 장로 1인식 택할 일이오며...2)
이미 조사로 시무하며, 신학교를 졸업한 함태영은 목사 안수 받은 후 청주읍교회 목사로 시무하도록 내정되었다. 승동교회에서 개최한 경기충청노회 제23회 노회에서 함태영은 목사로 안수 받는다. 그리고 1923년 1월에는 소열도 목사 위임 동사목사로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함태영 목사는 1923년 1월 7일 오후 2시에 목사 위임식을 가졌다.
사회는 소열도 목사였으며 이명혁 목사가 강연하였다. 사회자가 함 목사와 교인들에게 문답하였으며, 그 후에 안대선 목사는 함목사에게, 소열도 목사는 교인들에게 각각 권면의 말씀을 하였다. 이후 함목사 축복 기도로 마쳤는데, 이날 참석한 내빈으로는 노회에서 파송된 이명혁, 안대선, 곽경한, 김주현 등 여러 목사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날 약 300여명이 모여 위임예배를 드렸던 것이다.1).
당시 청주선교부는 로간 부인의 별세2)와 계군 목사의 사임3)으로 선교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였고, 청주읍교회 또한 최영택 목사의 사임으로 목회자의 공백 상황으로 함태영 목사의 부임은 큰 힘이 되었다.
(2) 함태영 목사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목사, 독립운동가, 법조인, 정치인 함태영(咸台永 ; 1873~1964, 호는 松岩)은1873년 12월 2일 함경북도 무산(茂山)에서 부친 함우택(咸遇澤)과 모친 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4).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부친 함우택의 무과 급제로 1889년(고종 26년) 관직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한국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제1회 졸업생에는 이준 열사도 있다. 이후 1907년까지 13년 간, 한성지방 재판소 검사 시보, 판사, 검사, 고등 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대심원 판사 등을 거쳐 통감부 시대에는 경성공소원 판사, 경성복심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지조로 사법권 독립을 위해 싸웠고 강직한 성품으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 복직을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피검된 이상재를 엄벌하라는 법무부대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법 집행을 했다. 이 일로 파면되었다 곧 복직되었다. 또한 사형 언도된 이승만의 형량을 7년으로 감형시킨 일도 있었다.
그는 연동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부친을 따라 일찍이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36세 되던 1908년 복부내종(腹部內腫)으로 사경을 헤메다 기도의 힘으로 낫는 체험으로 더욱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이후 연동교회 집사로, 1911년 8월에는 연동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5년 경충노회의 추천으로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신학교 재학 중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로 임명(1918년)되어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 때에 남대문교회 교인인 이응설, 이갑성 등과 교분을 갖고 이들과 함께 3․1운동 기독교 측의 주요 추진 세력으로 활약하였다.1) 그의 집은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는 민족 대표 48인 중 한명이었으며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도 있었다. 민족 대표 서명인 33인 중에는 빠져 있으나, 해외에 나아가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임무를 수행하였기에 역사가들은 그를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지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3․1운동에서 그의 활약으로 기독교 각 교파간의 연합 및 기독교․천도교․불교와의 제휴가 가능하였다고 보고 있다.
1920년 9월 그는 경성복심원에서 손병희․최린․권동신․오세창․이종일․이일환․한용운 등과 관련자 중 최고형인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2)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1921년 12월 가석방되었다. 이후 신학을 계속하여 1922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해 12월에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했다.
(3) 함태영 목사의 사역과 교회 부흥
함태영 목사는 1922년 조사로 청주읍교회에 부임하여 그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소열도 선교사와 동사목사로서 부임하였다. 그는 1928년 마산 문창교회로 이임하기까지 7년간 목회하며 교육과 청년 운동과 일꾼 세우는 일과 교회 환경 개선에 노력하였다.
그는 1923년 부인전도단을 조직하였고, 장로 이호재를 조사로 채용하여 전도를 확대하였다. 그의 부임으로 청주읍교회가 날로 부흥하였다.
2) 그는 공판 중에도 독립 운동에 관여한 사실을 떳떳하게 증언하였으며, 독립의 시기를 묻는 재판장에게 “조선 독립의 성공은 시세와 기회와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라고 신앙인의 자세로 답변하였다.
“감사할 일 : 각 교회가 주 은혜 중 평안히 지내오는 중 교유들이 신령한 재미를 얻어 믿음이 굳게 되오며 새로 열심과 전도의 새 소망이 많사오며 청주읍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 함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으며 함태영 장로를 청빙하여 조사로 사역하게 된 일과 새로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많이 증가되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