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표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제정하다.
남산교회를 개척하다.
박종헌장로 장립하다.
제5회 기청 전국교육대회를 본 교회에서 개최하다.
최초의 교회 표어 제정
6․25 한국전쟁 이후, 전란으로 인한 상처, 장로교단 분열, 거기다가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과 같은 이단 사상의 출현으로, 교인들은 불안정한 가운데 있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교인과의 불화, 분파, 파당 행위를 지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상호존중하고 화해하는 신앙 공동체를 이룰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 구연직 목사는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 성도들의 바른 자세를 확립할 목회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먼저 온 교인의 신앙의 방향과 초점을 하나로 묶어 교회의 결집된 힘과 역량을 복음전파에 투입하고자 교회 ‘표어’를 제정하여 신년에 발표하였다.
최초의 표어는 1954년 신년에 발표한 “담대히 나아가자”였다. 이것은 히브리서 4장 16절 하반절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는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정한 것이었다. 6․25 전쟁 후의 사회 혼란기, 삶의 자리에서 당하는 궁핍함과 실패의 위협,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수많은 고통과 환난, 인간관계를 통하여 찾아오는 공허함 등으로 생에 좌절이 있다하더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을 표어로 삼았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깊이 뿌리 내림으로써 능력 있는 삶을 영유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이는 전후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또한 장로교가 분열하여 신앙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에,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여 때를 따라 은혜주시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의 생활태도, 곧 하나님의 목적과 인도하심, 동행하심을 확고히 믿고 붙잡는 신앙생활을 강조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남산교회 개척
당회에서는 1956년도 개척 사업으로 모충동에 개척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당시는 예장과 기장이 나누어지던 때로, 예장 측에서는 청주제일교회에 필적할 만한 교회를 구상하며 1955년 11월에 서남교회를 세우게 되자,1) 제일교회로서는 서부지역의 교인 및 모충지역의 전도 활동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제일교회에서 모충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여 기장의 거점교회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모충동의 고당골은 대장장이 등 빈민들이 많이 있는 지역으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그곳의 교인들은 징검다리나 꽃다리를 건너는 등 교회 출석하는데 불편함이 많았기 때문에, 구연직 목사는 이런 곳에 바로 교회가 있어야 한다면서 장암교회와 함께 모충동에 교회 개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동년 1956년 9월 15일, 이곳에 살던 이승백 씨 댁에서 첫 예배를 드린 후, 모충동 산 125번지에 터를 마련하여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하였고, 1956년 11월 25일에는 남산교회가 청주제일교회로부터 자립하여 분교식을 거행하였다. 이 사실이 주보에는
(1956년 11월 25일) 오후 2시에 남산교회 분교식에 제직은 참예하심이 좋습니다.
라고 하여 여러 제직들이 분교식에 참여할 것을 공지하고 있다.
이날 당회원, 여러 제직 및 성도들이 참여하여 남산교회의 자립을 축복하고 더불어 제일교회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때 초대 목사로 엄경술 목사를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미자립 상태였기 때문에 제일교회에서 목사 생활비를 지원하였고 유년주일학교 교사도 지원하여 운영하였다. 그 후에도 남산교회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1964년 2월 23일 주일에는 남산교회 의자를 위해 특별헌금을 하기도 하였다. 교역자가 부재중일 때는 제일교회에서 예배 인도자를 파송하였다.
제5회 기청전국대회(1956년 여름) 유치와 활동
첫날 밤 8시 30분에 개회 예배가 시작되었다. 사회는 연합회장 정훈 회장이 맡았고, 기도는 김용근 부회장이, 설교는 김재준 목사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찬양은 제일교회 성가대가 담당하였다. 특창으로 유영희, 광고는 홍정흠 목사가 담당하였다.
총회장이 함태영 목사였고 부총회장이 구연직 목사의 교회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도 교회 위상이 높았다. 더욱이 전국적으로도 충북노회만큼 많은 교회가 기장을 택한 경우는 흔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청주제일교회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 행사는 기청연합회장 정훈(초동교회), 청년회 충북연합회 회장 최동준 군을 비롯하여 이쾌재, 박재봉, 남완희, 최동익, 박근주 등 여러 청년들이 교회와 노회의 도움을 받아 원활히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청대회는 기장의 짧은 역사가운데에서도 지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교회 청년들의 자율적이고 조직적인 운영에 의해 추진되었고 모든 활동이 주제에 집중적이어서 전국대회로서 성공적이었다는 평이었다. 더불어 이 행사는 몇 가지 중요한 의의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이 대회는 청년의 자주성과 진취성이 발현되었던 전국대회로, 청년연합회 차원에서 각 지방에서 모여온 젊은 세대들이 서로 신앙적인 깊은 인연을 맺고 유대를 강화할 수가 있었다.
둘째, 이 행사를 통하여 보여준 단결력과 행사 추진력은 이후 본교 청년회가 활성화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셋째, 장로교 교단 분립 이후 기장 충북노회의 교단의 정체성과 세력을 과시하였다.
넷째, 이 대회는 구연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모시기 위한 전초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평도 나돌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83년도에 본교에서 개최된 기청전국대회와는 성격을 달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의 기청대회는 각 지방으로부터 모여온 젊은 세대의 일꾼들과 신앙적인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본교 청년회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