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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예배당를 완공되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235] 청주제일교회 (현 예배당)헌당예배 1942.4.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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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조 예배당 건축

 

1938년 청주제일교회에 부임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탄압으로 교회가 고통을 겪고, 거기에 담임목사마저 공석이라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것의 기폭제가 된 것은 교회당 건축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전쟁으로 인한 징용·징집이 한창이고, 물자도 부족할 뿐 아니라 신앙박해도 심하던 그 때에, 교회당을 건축한다는 것은 실로 쉽게 추진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새로 부임한 구연직 목사는 박상건 목사 시절부터 계획한 예배당 건축 사업을 계승하여 신축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박상건 목사는 청주제일교회에 부임한 후 먼저 추진 한 것이 예배당 신축 문제였다. 일제의 탄압가운데에도 교인들이 증가하여 예배당이 협소하다고 생각한 그는 기존 목조 예배당 대신에 석조 예배당으로 아름답게 지을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서울에 있는 건축설계사에 의뢰하여 신축 도면을 작성하고, 완성된 교회의 아름다움을 제시하여 교인들의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교인들의 교회 건축의 열의와 재정 확보를 위하여 부흥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박상건 목사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이로 인해 그는 만주로 망명하였으며644) 그로 인하여 교회 신축문제가 중단되고 있었다.

이처럼 담임 목사의 망명, 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얽힌 불안정한 교계의 정황, 물가 및 자재비 인상으로 인한 재정적 차질, 청남학교의 이전 문제 등으로 교회 신축이 2년간이나 지연되고 있던 차에 구연직 목사가 부임하여 다시 예배당 건축 공사를 추진하였다.

 

특히 1939년 청남학교와의 대지문제가 해결되자, 이미 확보한 건축비 3만3천원으로 1939년에 신축공사를 착수하여 마침내 1941년에 준공하여 아름다운 교회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물가의 앙등으로 인해 석조로 설계된 예배당을 벽돌조로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공사는 기본적으로 기 설계된 석조 예배당의 도면을 활용하였고 직영으로 운영하려던 계획은 계속 추진하였으며 감독으로 교인 이창수, 감리는 도청 토목과장에 의해 추천받은 일본인 나까무라(中村), 부분하청업자 목수 김씨 형제 등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건축자재로 사용된 석재는 전에 마련한 화강석을 사용하였고, 벽돌은 지역에서 제조하여 사용하였으며, 시멘트는 군산에서 구매하였고 비계용 목재는 제천에서 사다 썼다. 교회 감독과 일본인 감리, 부분하청업자인 김씨 형제간의 상반된 이해관계로 인해 공사기간이 장기화되어 2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공사 도중 전시체제하에서 일제 당국의 간섭과 방해로 종탑을 설계보다 9척이나 낮추지 않으면 안 되었고, 교회 종도 강제로 빼앗겼으며, 교인 3명이 부여신궁 공사에 강제로 징발되기도 하는 등 가슴 아픈 일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마침내 1941년 건축을 완성하여 그동안 존재하였던 목조 예배당이 벽돌로 된 근대식 2층 예배당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청주 지역의 큰 명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대전교회는 光金永一 목사가 겸임 시무하기로 하다.

대전제일교회도 개척하여 지도자를 보내고 교회 건축비를 보조하여 마침내 오늘의 대전제일교회(예장 통합)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상필 장로 회상록에서

 

大田第一敎會 로 발전(發展) (p.62)

 

 1938년 처음 이종만 집사(그 후 장로가 됨)와 2년간 開拓을 하는 중에 敎會新築工事로 인하여 中斷이 되고, 경  환 목사님이 가셔서 苦楚를 겪으시며 이룩하신 교회가 예수교장로회 大田第一敎會이다. 나는 淸州第一敎會  第70週年(1974) 記念式에 招請을 받아 參席을 하니, 淸州第一敎會가 開拓ㆍ設立한 大田第一敎會 牧師와 長老가 초청을 받아 왔다는 말을 듣고 옛 開拓時節을 회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面對하여 인사를 나눈 일이 있었다. 1995년 5월에 가 보고 싶은 衝動이 생겨서 내려가 보았다. 크고 웅장한 敎會堂이 큰길 옆에 서 있었다. 朴鍾德 2)牧師와 여러 長老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예배에 참여하여 會衆에게 인사를 하며 致賀의 말씀을 드리고 온 일이 있다. 本堂과 부속 건물이 많다. 그리고 선배 金萬濟 목사의 크신 노력과 열성으로 市內에 7개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놀라운 공적이 아닐 수 없다. 들으니 敎會堂을 헐고 다시 대건물을 짓기 위하여 募金 중인데 현재 8억 원의 헌금이 모아졌다고 하니 대단한 노력들이다. 수백 명의 집사와 수십 명의 장로가 一心으로 교회를 받드는 것을 보고 감사를 드렸다. 전 교우가 한 목소리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크게 발전될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근 60년 전, 好意로 방을 빌려주신 어른과 당시의 어린 소년들이 현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지 물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퍽 허전하였다. 목사와 원로 장로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태워 주어 大田驛까지 무난히 왔다. 이종만 장로와 同行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혼자 말동무 없이 다니게 되어 정말 허전하다.

 三 년후인 1998년 7월 21일 都基甲 장로님이 뜻밖에 서울에 오시어 놀랍고 반가운 消息을 전하신다. 본당 건물을 헐고 새로이 건축하였는데 다음 8월 9일 創立60週年記念式을 가지니 참석하라고 招請을 한다. 벌써 건축이 다 되고 또 60週年이 되었다니 두 번 놀랐다. 9월 8일(主日) 염치 불구하고 참석을 하니 천만 의외에 필자에게 開拓記念牌를 주었다. 나는 단지 개척을 시작한 것 뿐이며, 교회를 경  환 목사님이 세우셨는데 당치도 않는 필자가 記念牌를 받으니 면구하고 송구하다. 같이 시작한 이종만 장로가 이 자리에 동석하였다면 부끄러움이 덜하였을 것인데 遺憾이며 허전하다. 본당을 둘러보니 垈地 700여평에 지하 2층, 지상 3층의 총 1234평으로 禮拜席이 1200석이다. 건물 외형과 내부가 모두 最新型의 設計로 華麗하면서도 便利한 구조와 부드럽고 便安함을 주는 禮拜室이다.

 우연의 일치로 1938년 槐山의 慶  煥 牧師님이 시작하시고 1983년 1월 역시 槐山 朴鍾德 牧師님이 4代로 赴任하였다. 활발한 宣敎活動으로 볼리비아와 필리핀 양국에 敎會堂을 신축하고, 大田老人大學 事業活動을 하시며 敎人數가 점점 많아지자 교회가 狹小하여 開拓60週年만에 大田光域市에서 제일 웅장한 敎會堂을 세웠다. 이는 60년만에 槐山 出身의 양대 牧師님의 育成으로 그야말로 槐花가 大田에 피게 된 것이고 열매가 맺힌 것이다.

 

제목
교회 전체 연혁
1960년 세광고교 대성동으로 이전하다. file
1958년 박기순,박윤이,오성애,이삼례,장복덕, 조윤순 안수집사에 취임하다.
1957년 구연직목사 총회장(제 4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56년 최초의 표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제정, 남산교회를 개척,박종헌장로 장립하다.제5회 기청 전국교육대회 유치
195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다. 박찬석장로 장립하다.
1953년 세광고등학교를 설립. 교회희년 축하예배. 청신고등공민학교 인수하여 운영하다.
1952년 북문교회를 개척하다. 김현태장로 장립하다.
1951년 교회 증축공사를 완공하다. 주보 창간호를 발간(10월 7일 제 1호)하다. file
1950년 학생회 '성종' 창간호를 발간하다.
1949년 교회증축공사를 착공하다. 세광중학교를 설립하다.(9.15)
1948년 이창수, 홍청흠장로 장립 하다.
1947년 학생성가대 조직(메시야성가대)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 구연직목사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 반공투쟁 주도하다.
1946년 충북노회를 조직되다. 초대 노회장으로 구연직목사 피선되다.
1945년 Y.M.C.A를 설립 하다. 소년,소녀 면려회를 조직하다. file
1942년 선교사들 철수하다.
1941년 충청성경학원를 설립하다
1940년 현 예배당를 완공되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file
1939년 현 예배당를 착공하다. file
1938년 구연직(9대) 취임하다. 송재경, 안희상장로 장립하다.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1936년 김영로목사 사임하다.박상건목사(8대) 취임하다 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