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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직(9대) 취임하다.(11.2) 송재경, 안희상장로 장립하다.

 

구목사의 부임

 

구연직(具然直;1891∼1967, 호는 英南) 목사는 1891년 7월 9일, 부여군 임천면 두곡리 23번지에서 아버지 구송식과 어머니 임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본관을 능성(綾城)으로 하고 있던 명문의 구씨 집안 태생인지라, 일찍이 유년시절부터 엄한 부모의 슬하에서 한학을 익혀 사서삼경을 통달했으며, 남달리 배움의 의욕이 강하여 길을 가다가도 송덕비나 묘비를 보면 무심코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그는 비문도 줄줄 읽고 해석할 정도로 한학에 능통했다.

1906년 16세에 동년배인 부인 백경애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4녀를 두었으며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었다.

우리 민족의 국권을 앗아간 1910년 한일 합방은 약관 20세의 구연직 목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한때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분을 터뜨렸으나,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밖에 없음을 일찍 통감하여 마침 충남 서천군 종촌면 석촌리 석촌교회의 만동학교에서 훈도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그곳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인재양성에 열과 성을 다했다.

구연직 목사는 석촌교회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예수를 영접했다. 복음의 진리를 터득한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학교와 교회에서 일꾼들을 양성해 내었다.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주일학교에서의 지도력 또한 탁월했다. 1926년, 당시 충남 서천·보령·부여 지방까지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던 군산노회에서는 그의 신앙심과 지도력을 인정하여 그를 전도사로 세웠다. 이리하여 구연직 목사는 군산과 충남지방 순회전도사로서 전도사역을 담당했으며, 이후 이리중앙교회, 금암교회 등지의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은 목회자의 길임을 일찍이 터득한 구연직 목사는 끝내 청운의 꿈을 안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36년 평양신학을 졸업 후 목사가 되어 전북노회의 황등교회에서 시무했다. 그는 황등교회에서 제직회를 조직하고 모든 제직을 훈련시켰으며 장로를 선출해서 목회의 협력자로 삼으며 교회를 발전시키다가 1938년 11월에 청주제일교회 제9대 목사로 부임했다. 그해 여름 청주제일교회에서 개최된 도사경회의 주강사로 초빙된 것이 청주제일교회로 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643) 당시 제일교회는 전임 박상건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만주로 망명하여 공석 중이었기에 담임 목사를 찾고 있던 중,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끼친 구연직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한 것이다. 높은 학문과 깊은 신앙, 거기에 금상첨화로 달변가에 신령한 부흥사로서의 명성 등으로 제일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는 1938년 11월 2일(수)에 부임하여 1961년 2월 18일(토) 은퇴하고 원로 목사로 추대될 때까지 22년 3개월간, 전도와 교육, 그리고 사회 참여 등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교회를 크게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일제의 탄압, 기장과 예장의 분열로 인한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며 성장시키는 데 커다란 업적을 남기었다

 

제목
교회 전체 연혁
1960년 세광고교 대성동으로 이전하다. file
1958년 박기순,박윤이,오성애,이삼례,장복덕, 조윤순 안수집사에 취임하다.
1957년 구연직목사 총회장(제 4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56년 최초의 표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제정, 남산교회를 개척,박종헌장로 장립하다.제5회 기청 전국교육대회 유치
195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다. 박찬석장로 장립하다.
1953년 세광고등학교를 설립. 교회희년 축하예배. 청신고등공민학교 인수하여 운영하다.
1952년 북문교회를 개척하다. 김현태장로 장립하다.
1951년 교회 증축공사를 완공하다. 주보 창간호를 발간(10월 7일 제 1호)하다. file
1950년 학생회 '성종' 창간호를 발간하다.
1949년 교회증축공사를 착공하다. 세광중학교를 설립하다.(9.15)
1948년 이창수, 홍청흠장로 장립 하다.
1947년 학생성가대 조직(메시야성가대)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 구연직목사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 반공투쟁 주도하다.
1946년 충북노회를 조직되다. 초대 노회장으로 구연직목사 피선되다.
1945년 Y.M.C.A를 설립 하다. 소년,소녀 면려회를 조직하다. file
1942년 선교사들 철수하다.
1941년 충청성경학원를 설립하다
1940년 현 예배당를 완공되다. 대전제일교회를 개척하다. file
1939년 현 예배당를 착공하다. file
1938년 구연직(9대) 취임하다. 송재경, 안희상장로 장립하다.
1937년 박상건목사 신사참배 문제로 만주로 망명하다.
1936년 김영로목사 사임하다.박상건목사(8대) 취임하다 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