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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1  구연직 목사 근속20주년 기념예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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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4.24  조선출 목사 위임식을 마치고.jpg


구연직목사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하다.

 

조선출 목사의 부임과 사역


(1) 목사 부임
1961년 2월 18일에 구연직 목사가 나이 70이 되어 청주제일교회에서 영예롭게 은퇴하였다. 그간 일제말기, 해방 및 6.25 동란 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그 어려운 시대적 여건 가운데서도 교육, 전도, 사회 참여 등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교회 발전에 헌신하여 오다가 부임한지 22년 2개월 만에 은퇴한 것이다. 그 후임으로서 10대 목사로 조선출목사가 뒤를 이었다. 구연직 목사가 김재준 목사에게 추천을 의뢰하여 추천을 받은 것이다.


조선출 목사(1915. 3. 2-2003. 9. 10)는 1915년 3월 2일 지리산 산록의 경남 합안군 북면 사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35년 3월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부 본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41년 3월에 졸업한 후, 귀국하여 12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6년, 그는 조선신학교 전임강사가 되어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1953년에 한국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교수로 재직 중에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논문이 통과 되어 1956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 한신대학 학감으로서 학교 교육에 봉사하였으며 동시에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서기로 활동하였다. 또한 기독교 문서 선교에도 관심을 가져 대한 기독교서회 이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학감으로 있던 그는 신학교 건축비 모금 사업(애자 사건) 의 차질로 인하여 학교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책임을 안고 1960년 6월 한국신학대학교 교수를 사임하고 말았다.


데, 이 때 청주제일교회에서 담임 목사 청빙 소식을 알고 김재준 목사가 추천한 것이다. 훗날 김재준 목사는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淸州第一敎會에서 請聘書가 왔다. 나는 그를 권했다.  “어느 시골 교회에 가서 3년동안 목회에만 충실해라. 그리하면 네 신앙과 인격에 덮였던 암운(暗雲)이 걷힐 것이다.”
 그런데 청주제일교회는 큰 교회일 뿐 아니라, 忠北에서 母敎會다. 딴 생각 말고 승낙해라.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의 “牧會”에만 전념해라.”

그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신학교 학감 경력도 가지고 있는 지적인 목사였기에, 교회에서는 조선출 목사를 청빙하였고, 조선출 목사도 확실한 임지가 없었던 때에 유명한 청주제일교회에서 청빙하니 거기에 호응한 것이다.
그리하여 1961년 2월 18일에 10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0대 목사로 부임한 조선출 목사는 4월 23일에 목사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교수직에 있다가 첫 목회 부임지였던 관계로 충북노회 교역자는 물론 경향 각지에서 하객들이 모인 가운데 온 교인들과 함께 성대히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오전 주일 예배는 대한기독교서회의 김춘배 목사가 설교를 하였고, 오후 위임 예배 때에는 김정준 목사가 설교를 담당하였다. 행사가 끝난 후 한국신학대학, 대한 기독교서회, 충북노회 등 외부 하객 인사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거기에 약 60여명의 외부 인사들의 늠름한 모습이 보이는 데 이것은 그만큼 대외적으로 큰 활동을 한 인물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날 이기도 성도가 교회 정문의 철문을 제작하여 헌납하였는데 이는 좋은 미담이 되었다.
조선출 목사 사모는 이복영 교수로, 이대 간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주말 부부가 되었다. 사모는 주말이면 청주로 내려와 예배에 출석하였다. 애자 사건이 있은 후라 혼자 내려와 생활하였던 것이다.
 
(2) 교회 부흥을 위한 노력

새로 부임한 조선출 목사는 먼저 교인 배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61년 3월부터 교인 배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란 한 교인이 한 사람씩 전도하여 데리고 오도록 한 것인데, 청주제일교회 목회는 그간 교수 새활을 하던 그로서는 첫 목회지였으니 새로운 꿈과 비전으로 사역을 시작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재임 중 상당유치원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힘썼다. 이사회를 조직하여 상당 유치원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기독교 상식 문제 연구반을 조직하여 매주일 9시 30분에 지도하였다. 기독교의 전반적인 상식 이른바, 기본으로 알아야 알 기독 교리, 교회 의례 및 규범 등을 성도들이 이해함으로써 수준 있는 교인으로 성장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부흥을 위하여 교회 부흥안을 연구하여 조직적으로 목회하여 나갔는데, 이 때 처음으로 제직회 규칙을 제정하였다. 이일을 위하여 규칙 초안 작성자로서 박종헌, 김영훈, 최인호, 최동준 홍청흠 등이 규칙 초안 마련 준비위원으로 수고하였다.
그리고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으로 성장하고 늘 말씀을 묵상하도록 성경 통신공부를 실시하였다. 1963. 12. 15에는 성경통신공부 제89주까지 마치고 성적을 내어 시상하였다.
1964년 주보에 직원의 표어 “맡은 일에 충성하자”와 금년도 실천목표(신앙생활 10훈)를 매 주보에 실어 경각심을 가지고 성도들이 건전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