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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최초의 장로 박정찬, 충북 최초의 장로교 목사

 

peo_02.gif박정찬(朴禎燦, 1862~1945) 목사는

1862년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고향에서 농장의 농감(農監)으로서 활동하면서 일족의 기대 속에 미래를 설계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30세 경에 친족이 서울의 한 내관의 돈을 축내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정찬은 족징에 걸려 친족의 물어야 할 돈을 대신 물어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조상으로부터 모아 둔 재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거기에 계속되는 흉년과 청일전쟁으로 기울어진 가산은 좀처럼 회복되기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유행하던 역병으로 여러 가족을 잃는 비운을 맞아 슬픔과 난관에 봉착하여 어려운 나날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때에 마침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나 그에게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다.

1899년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어 영수급 매서인이 되어 평안도 지방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1905년 평양 남문외교회의 조사가 되었고,

1906년에 그 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다. 신앙심이 돈독하고 신실한 그는

1907년에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아들 박예헌(朴禮憲) 군과 함께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들과 신학교 동기 동창이 된 셈이다.

 

평양 남문밖교회 교인인 그는 신학교 재학 중인 1909년에 청주읍교회 조사 겸 장로로 파송되어 처음 청주에 내려왔다. 박정찬이 청주읍교회에 장로로 취임함에 따라 마침내 최초의 당회가 성립되었고 조직교회가 되었다.

장로 신학생인 그는 1910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청주읍교회 동사 목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민노아 목사 계군 목사 등 청주선교부의 외국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청주읍교회에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출현한 것이다.

 

그는 청주제일교회에 재임 시, 민노아, 계군, 도티 여사, 로간 부인 등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목회에 열심을 다하여 신도수가 크게 증가하여 예배당이 비좁을 정도였기에 건물을 확장하여 약500여명 수용할 수 있는 교회 예배당을 완성했다.

또 주변에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를 테면 金顯寬을 보내어 북일면에 오죽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신병으로 1912년에 1년간 휴직하였다. 휴직하고 있을 때에, 그해 11월 그는 남문밖교회에 위임되었다.

 

서울 남문밖교히로 전임하여 만 6개년간 시무하였으나 정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미 늙고 병약한 데다가 남문밖교회는 제중원과 전문의학교가 있음으로 각 지방 신자들이 많이 몰려드는 곳이 지적 수준도 높은 곳이어서 함태영 목사에게 물려주고 목사직을 사임했다.

그 후 그는 1917년 12월 17일에 서울을 떠나 원산으로 향했다. 원산은 그의 아들 박예헌 목사가 목회를 하던 곳이었다, 원산 정거장에는 교인들이 마중나왔다. 당시 그는 함경노회로부터 노령 등지 교회를 시찰 순회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하여 원산에서 1주간 머문 후 12월 23일 주일 예배를 드린 후 밤 7시에 배를 타고 러시아 땅 해삼위로 갔다. 나흘 걸려 27일에 해삼항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서울과 달리 눈이 많이 쌓여 있고 바람도 혹독하기만 하였다.

 엄동설한의 강 추위는 객지에 혼 그를 더욱 외롭게 했다. 한 교인의 안내를 받아 마차를 타고 신한촌예배당을 찾아가 그곳에 머물렀다. 목사의 사모는 병약하여 그대로 서울에 남았었다. (1918. 4.3 기독신보)

 

목자 잃은 양 같이 이리 저리 헤메던 우리 동포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사회가 뒤숭숭하고 전도활동이 탄압을 맞게 되자 그는 1919년 10월에 다시 귀국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해 10월, 그는 청주제일교회에서 사경회 강사로 요청을 받아 청주에 내려왔다. 청주는 전에 목회 하던 곳이라 추억정감이 있어 다시 내려왔다. 3.1운동이 일어난 후에 해당하는 당시, 해외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외부인이라는 것 때문에 항일운동가로서의 혐의를 받아 그는 서울 경찰서의 지시를 받아 청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그로부터 혐의 사실을 발견할 수 없어 석방하였다. 그 후 12월 14일에 원산으로 다시 돌아갔다. (기독신보 1919.10.29)

 

그는 1919년 11월에 문창교회 제4대(1919-1924.9)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1924년 9월에 사임하고 다시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견되어 해외 동포를 위해 선교했다. 그 후, 1926년에 다시 대구제일교회(당시 大邱南城町敎會)에 부임하였다가 1929년에 원산을 거쳐 아들과 함께 간도에 들어가 전도했다.

 

  그는 1922년 문창교회 시무 시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부총회장을 역임하였는데, 이 때에 청주제일교회는 최영택 목사가 사임한 이후 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하러 청주에 내려오기도 했다.

그는 백발의 긴 수염에 좋은 풍채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노령에 허약한 체질을 지니고 있어 한 군데에서 오래 목회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목회하였다. 특히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시베리아와 간도 지방에서 우리 동포를 위해 복음 전도활동을 폈다. 그는 말년에 길림성 용정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생을 마쳤다.

제목
교회 전체 연혁
1934년 창립30주년 기념행사, 제2교회(현중앙교회)분립하다. file
1932년 경환목사 사임,김영로목사(7대) 취임,부속건물 신축(목사관,전도실,유치원)를 하다
1931년 이상필장로 장립하다.
1929년 상당유치원를 개원하다. file
1928년 함태영목사 사임.경환목사(6대) 취임.하기 아동성경학교를 개최하다. file
1924년 서상필 장로 장립(10.1)
1923년 망선루를 본 교회내로 옮기다.함태영목사 총회장(제 12회 총회)에 피선되다.
1922년 함태영목사(5대) 취임,이호재장로 장립,청주성경학원를 설립, 청신야학를 운영하다. file
1921년 최영택목사 사임,황청교회 개척를(현 상야교회)하다.
1920년 외덕교회를 분립(현 우암교회),김태희, 최원진 장로 장립,예배실 남녀 좌석 구분 휘장를 철거하다.
1919년 3.1만세 운동 전개를 시도하다 실패하다.남자 전도회를 조직하다 file
1918년 황준국목사 사임,최영택목사(4대) 취임.김정현, 김중원 장로 장립,청년전도부를 조직하다.
1917년 소민병원를 건축하다. file
1915년 곽경환, 이동순 장로 장립하다.
1914년 이원민목사 사임하다. 황준국목사(3대) 취임하다.
1913년 최영택장로 장립(최초의 피택장로)하다. 부인 전도회를 조직하다 file
1912년 박정찬목사 사임하다. 이원민목사(2대) 취임하다.
1911년 오죽교회를 개척하다.
1910년 박정찬목사 초대목사로 취임하다.
1928년 당회조직하고 덕촌교회을 개척하다.
1904년 청남학교를 설립(현 청남초등학교) 하다. file
1904년11.15 청주읍교회를 설립하다.